노란 비표와 타자 소리 [슬기로운 기자생활]

장현은 기자 2024. 7. 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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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

바로 기자의 타자 소리다.

널리 알려진 사건은 비표를 목에 건 많은 법원 기자들이 줄을 서서 한꺼번에 법정에 들어간다.

재판장이 판결의 결론 부분인 '주문'(主文)을 읽기 시작하면 기자들은 '주문'(呪文)에 빠진 듯 타자 소리가 빨라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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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출입 언론사에는 별도의 비표가 제공된다. 대부분의 재판이 열리는 소법정에서 이 노란색 비표를 목에 걸고 있는 기자에게는 노트북 사용이 허가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장현은 | 법조팀 기자

‘탁탁.’

목에 건 출입증이 셔츠 단추에 부딪히는 소리까지도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하다. 재판장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누구도 발언할 수 없다. 휴대폰 울리는 소리는커녕, 휴대폰을 오래 보거나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쫓긴 경우도 여러번 봤다. 그만큼 정제된 법정에서 허락된 몇 안 되는 소음이 있다. 바로 기자의 타자 소리다.

‘법원을 출입한 지’ 4개월이 가까워진다. 법원을 출입한다는 것은 서울 서초구에 있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출근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곳이 출근지가 된다는 것은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등법원 등의 재판을 챙기고, 여기에서 비롯된 다양한 기사를 쓴다는 것이다. 형사·민사·행정 재판을 가리지 않는다. 들어가는 재판의 피고인은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같은 국회의원이나 배우처럼 유명인도 있고, 아주 평범해 보이는 시민도 있다. 에스엔에스(SNS) 글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제기하는 100만원짜리 손해배상일 때가 있고, 망인의 삶과 죽음의 가치가 얼마인지를 다투는 수억원의 손해배상일 때도 있다. 법원은 그야말로 ‘사건의 집합소’다.

기본적으로 재판은 공개가 원칙이다. 미리 신청해야 하는 특별한 몇몇 재판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재판을 방청할 수 있다. 다만 법원 출입 언론사에는 별도의 비표가 제공된다. 대부분의 재판이 열리는 소법정에서 노란색 비표를 목에 걸고 있는 기자에게는 노트북 사용이 허가된다. 취재를 위한 일종의 특권이다. 널리 알려진 사건은 비표를 목에 건 많은 법원 기자들이 줄을 서서 한꺼번에 법정에 들어간다. 특히나 선고기일은 중요하다. 재판장이 판결의 결론 부분인 ‘주문’(主文)을 읽기 시작하면 기자들은 ‘주문’(呪文)에 빠진 듯 타자 소리가 빨라지기도 한다. 재판이 얼마나 붐비느냐가 그 사건에 대한 관심도를 보여준다. 관심 있는 사건 선고가 지나고 나면 썰물 빠지듯이 방청석의 사람도 빠진다.

그런데 요즘 종종 고요한 법정을 채우는 내 타자 소리가 스스로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소음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다. 취재 특권이 주는 부담감에서 오는 감정이다. 법정이란 공간은 극적이다. 기자는 사건의 어느 중요한 순간을 포착하는 직업인데, 법원은 중요한 순간들이 모이는 곳으로 여겨진다. 가끔은 내가 이 장면을 들여다봐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다. 잔혹하게 살해된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이 모니터에 현출되고, 그 장면을 보고 일제히 손수건을 꺼내는 유족들의 훌쩍거림을 듣는다. 억울한 죽음을 이야기하고, 수년간을 기다린 재판에서 패소한 뒤 축 처진 원고의 어깨를 본다. 누군가의 생애에서 가장 부끄러운, 절망적인 혹은 가장 기쁜 순간들이다. 거기에 타자 소리를 얹어서, 그것을 기록한다.

기자는 독자를 대표해 취재한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기자라는 이유로 그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보고, 듣고,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따라 기록할 수 있는 무거운 특권이자 의무를 주는 게 그 노란 비표다. 가끔 비표를 걸고 들어가 방청석 맨 앞에서 노트북을 열고 타자를 하고 있노라면 피고인이, 변호인이, 방청석의 가족이 한번쯤 내게 주는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법원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이 작은 비표도 있다. 법정을 옅게 채우는 이 타자 소리가 부디 좋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길, 굽었던 허리를 다시 한번 펴야겠다.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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