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대한민국’과 ‘두 교전국 관계’ [안병욱 칼럼]

한겨레 2024. 7. 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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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망국적 분단구조가 80년째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반도는 1953년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에 실제적으로는 전쟁이 끝났음에도 지금껏 평화 아닌 휴전 상태에 놓여 있다. 이는 안에서 전쟁과 무력충돌을 구실로 지배권력을 구축하고, 밖에서는 한반도를 빌미로 무력충돌을 야기해 군비 증강과 패권을 행사하려는 세력들 때문이다. 그동안 전쟁과 전쟁 준비를 위해 치러야 했던 인적·물적 손실과 희생은 헤아리기조차 불가능하다. 야만적 비극이 두 세기에 걸쳐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는 우리 민족이 생존해온 오랜 역사 무대이며 터전이다. 열강은 그 생활 공간을 인위적으로 단절시켰다. 그렇게 쪼개진 국토는 생활 터전이 아니라 남북 상호 간에 적대의 싸움터로 전락했다. 국토의 분단은 그 안에 뿌리박고 살아온 가족·친척·동지·친구들의 공동체를 헤집어 분해했고, 혹은 서로 간에 적대감으로 증오하면서 총부리를 겨누게 했다.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수백만명이 살상된 참혹한 비극을 겪고도 여전히 앙앙거린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에서 확인한 바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다 어느 날 느닷없이 가족을 잃고 생이별했던 사람들 가슴속에 통절하게 새겨진 한탄과 분노는 흐르는 세월로도 지울 수 없는 비극의 민족사가 됐다.

민족분단은 새로운 권력층을 낳았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견고한 분단체제가 구축됐다. 그들 지배권력은 분단 과정에서 외세에 부수되어 등장했거나, 봉건시대의 지배층과 식민지 침략의 잔재에서 파생되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얼마 전 간행한 회고록에서 우리 사회에는 ‘확연히 대비되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세력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분단 상태를 정권의 목적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면서 적대적 공생을 추구하는 세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단을 어떻게든 극복해나가야 한다, 통일이 최고의 형태이지만 통일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평화를 이루고, 서로 왕래하고 교류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세력이라고 했다.

그들 적대적 공생을 추구하는 세력이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분단 논리로 각기 사회를 옭아매, 역내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거나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해왔다. 국민의 기본권이 일상적으로 제약당하고 사상 탄압이 자행되는 준계엄 상태에서 올바른 시민주권 사회가 성립하기는 어렵다. 분단시대는 맹목적 편견과 국가폭력으로 얼룩진 야만사회가 됐다. 그렇듯 하나의 나라였던 것이 둘로 쪼개짐으로써 민족의 문화와 생활전통이 단절되고 역량이 분산되고 국토의 효율적 이용도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은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을 제약당한 채 전쟁의 먹구름 아래서 교조적 사고의 틀에 갇혀 지냈다.

분단체제로 인해 형성된 서로 간의 불신과 극도의 적대감을 가지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관계에서는 민족의 파멸로 가는 길 외에 달리 정권의 안정도 기약하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첨예하게 적대적이었던 박정희, 김일성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1992년 남북한 당국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지난날 전쟁을 치러 파멸을 자초한 적이 있는 처지에서 평화의 합의는 불가결한 사항이었다. 통일은 곧 평화이고 평화를 향한 귀결이 곧 통일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위정자들에게 평화 정책의 실제는 공공의 안녕과 시민의 안전을 위한 평화가 아닌 무력시위와 전쟁연습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동안 어렵게 추진해온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을 ‘가짜 평화’라고 내치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부르짖고 있다. 3·1절 기념사에서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라고 하면서 “자유로운 통일 대한민국”을 외쳤다. 무력을 앞세워 굴복시켜야 통일이고 평화라는 인식이다. 마치 중세 종교의 ‘참된 평화’라는 광신적 주장에 따라 정복전쟁을 감행하던 사고와 유사하다. 그 바탕에서 가치외교라는 것을 내세워 긴장을 조성하고 우크라이나 전쟁터를 찾아 자청해서 한반도 정세의 불온한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급기야는 미국·일본의 군사전략에 끼어들어 중국·러시아와 대립하는 데 앞장서는 등 한반도 주변을 폭풍전야의 불안한 상태로 이끌고 있다.

때맞춰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작년 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연설에서 ‘현재 한반도에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가 병존하고 있으며, 사소한 우발적 요인에 의해서도 물리적 격돌이 발생하고 확전될 수 있다’면서 남북 관계는 더는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했다. ‘남북한 단일민족국가’라는 인식을 접고 이제는 상호적대적인 별개 국가로 상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일 이대로 역사가 전개된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벌써부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학교 교육에서 ‘한반도 지도’나 ‘단일민족’ 같은 말을 삭제하도록 했다고 한다.

김정은의 발언은 북한 정권 정체성의 상징인 ‘남조선 해방’이나 ‘통일을 앞당기는 투쟁’ 등 명분론 대신에 현재 처한 실질에 근거해 정책을 펴겠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그 파장의 심각성에 비추어 설명은 군색스럽다. 만일 남북한이 똑같이 분단 정책과 민족 분할 행태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대립과 갈등이 역사적인 상수로 지속하게 됨을 뜻한다. 마치 지구 지각판의 충돌로 화산 폭발과 지진이 잦아 ‘지하의 전쟁터’로 불리는 ‘불의 고리’ 같은 지대처럼, 지역갈등과 종족·종교 전쟁이 끊임없이 야기되는 세계분쟁지역 고리에 이제 한반도도 포함될 테다. 이미 한반도를 가운데 놓고 북·중·러와 한·미·일 세력 판이 냉전시대 못지않은 대결을 벌이고 있다.

과거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패한 이후 발해로 갈라진 역사는 끝내 만주 일대의 생존 영역을 잃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분단정부를 세워 ‘38선 분할’을 용인한 잘못과, 이를 극복하겠다고 무력으로 전쟁을 일으킨 과오에 이어 다시 두개의 적대적인 국가 관계를 설정해간다면 이는 앞의 두 경우와 다를 바 없는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이 될 것이다. 이 땅의 누구도 8천만 민족의 미래 운명까지 함부로 재단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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