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성출혈열 규명한 ‘한국의 파스퇴르’

한겨레 2024. 7. 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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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1959년 귀국해서는 미 육군 쪽에서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제안받는다.

한국전쟁 당시 3천명 이상의 유엔군 병사들이 유행성출혈열에 걸렸다.

김근배 교수에 따르면 "미 육군과 이호왕은 서로 잘 어울리는 후원자와 연구자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호왕이 연구 여건을 갖추어 1960년대에 유행성출혈열 연구에 착수한 것은 미 육군의 물질적 후원을 받아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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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다] 이호왕(1928~2022)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1948년에 함흥의과대학을 입학했다가 월남하여 1954년에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한국전쟁 때문에 공부에 집중할 여건이 아니었다. 가난한 나라의 연구자 이호왕이 어떻게 세계에서 인정받는 의학자가 되었나?

성공 이유 하나는 연구 주제를 잘 잡았기 때문. 195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뇌염 바이러스를 연구했다. 한반도가 일본 뇌염의 유행 지역이기 때문이다. 1959년 귀국해서는 미 육군 쪽에서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제안받는다. 이 역시 한국 땅에서 유행하던 질병. 한국전쟁 당시 3천명 이상의 유엔군 병사들이 유행성출혈열에 걸렸다. 치료법이 없어 사망률이 높았다. “이호왕의 연구는 한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미국 등 선진국 연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주제였다.” 신미영 교수의 분석이다.

성공의 또 하나 이유는 네트워크를 잘 구축했다는 점이다. 김근배 교수에 따르면 “미 육군과 이호왕은 서로 잘 어울리는 후원자와 연구자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호왕이 연구 여건을 갖추어 1960년대에 유행성출혈열 연구에 착수한 것은 미 육군의 물질적 후원을 받아냈기 때문. 최신 정보와 연구자도 연결받았다. 1970년대 후반, 이호왕 연구팀은 유행성출혈열 병원체를 찾아냈다. 이평우의 기여가 컸다.

이호왕의 가장 빛나는 성공은 병원체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백신도 개발했다는 것이다. 1985년부터 미 육군 대신 세계보건기구(WHO)와 녹십자사의 지원을 받아, 세계 최초로 백신을 만들었다.

“모든 의사가 질병의 원인 규명과 환자 치료라는 소명에 따라 분투하지만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호왕 박사는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이 한탄바이러스 감염이라는 사실을 규명했을 뿐 아니라 예방 백신 개발에도 성공한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박사는 ‘과학자에게 우연은 없다. 우연은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선물’이라며 노력에 깃든 행운을 언급하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황승식 교수의 말이다. 이호왕은 2022년 7월5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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