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4일!] "북괴 아니고 북한"… 北 호칭 바꾼 최초의 공동성명

서지영 기자 2024. 7. 4.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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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7·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7월4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일성이 마주 보며 미소짓고 있다. /사진=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캡처
1972년 7월4일 역사적인 공동 성명이 발표됐다.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7·4 남북 공동성명'은 분단 이후 남·북한이 뜻을 모아 발표한 최초 성명이었으며 성명서에는 통일의 3대 원칙인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 담겼다.

분단 이래 남북은 서로를 '괴뢰 집단'으로 여기며 오직 무력을 통해서만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명을 통해 처음으로 대화를 통한 통일 가능성을 보여줘 당시 많은 사람에게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줬다.

74 남북 공동성명은 남북한 최초의 합의문서라는 점 외에도 1985년 남북경제회담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주요한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남북 관계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남북 공동 성명의 배경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7·4 남북 공동성명의 결정적인 배경은 당시 국제 정세에 불었던 '데탕트' 바람이다. 데탕트는 프랑스어로 '완화' 내지는 '휴식'을 의미하는 단어로 1940년대 후반 이래 냉전 구도 속에서 대결과 적대를 지속하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이 대화와 관계 개선을 추구하기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의 국제 정세를 일컫는 개념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은 데탕트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장악한 이래 양국은 오랫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들어 변화된 세계 정세 속에서 미국과 중국은 적대 일변도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 수립을 모색했다.

1971년 7월에는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자 미국 대외정책의 실세였던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지도부를 접촉했고 다음해 2월에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해 최초로 미국과 중국 간의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는 남북 대화 개시에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남북은 냉전의 양 진영간 긴장이 완화되고 대화가 이어지는 전 세계적 흐름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또한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 과정에서 한반도 문제가 주요 의제 중 하나로 다뤄질 것이 예상됐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흥정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대화에 나서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시작한지 두 달만인 1971년 11월19일 9차 예비회담 때였다. 당시 남측 대표 중 한명이었던 정홍진이 북측의 김덕현에게 쪽지를 슬쩍 전했다. 회의 끝나고 따로 보자는 내용이었다. 정홍진은 중앙정보부 국장대리로 재직하다 적십자로 전직한 상태였고 김덕현은 노동당 조직부 소속이었다.

이후 다음해 3월28일 정홍진이 최초로 비밀 방북을 했고 같은해 4월19일 김덕현이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이들의 실무적인 접촉 이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같은해 5월2일 평양을 방문했고 같은달 29일에는 북한의 박성철이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이러한 비밀 접촉 과정을 거쳐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됐다.



7·4 남북 공동 성명… 어떤 내용 담겼나


74 남북 공동 성명 합의서.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의 이름으로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 쌍방은 남북 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3. 쌍방은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인 제반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4. 쌍방은 지금 온 민족의 거대한 기대 속에 진행되고 있는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는 데 합의하였다.

5. 쌍방은 돌발적 군사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6. 쌍방은 이러한 합의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 사이의 제반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7. 쌍방은 이상의 합의사항이 조국통일을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합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



남북 공동 성명… 한계와 의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캡처
이 선언은 남북한 권력자들이 통일 논의를 자신들의 권력 기반 강화에 이용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를 구실삼아 선언 3개월 만에 대한민국은 10월 유신을 발표해 헌법을 이용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첫 남북간 대화의 물꼬를 튼 분위기 속에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해 주체사상을 확립했다.

이처럼 7·4 남북공동성명은 국제정세에 걸맞게 남북 간의 상호적대를 끝마치고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는 단계에 이르자며 합의한 내용이지만 권력 강화에만 이용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74 공동성명은 기존의 외세 의존적이고 대결지향적인 통일노선을 거부하고 통일의 기본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성명 발표 이후 통일의 원칙인 자주·무력지양도 확립됐다. 박정희 정권 하에 이뤄진 일이지만 대한민국 진보 진영에서도 이 선언만큼은 인정했으며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2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 2018년 판문점 선언 등이 모두 이 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공동 성명 발표 직후 북한을 지칭하는 표현에도 변화가 생겼다. 모든 언론과 정부의 공식 홍보물에서 '북괴'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북한'이 차지했다. 성명 발표 직후 이 중앙정보부장은 "공동성명에서 남북 쌍방은 상호 중상 비방하지 않기로 합의했는데 앞으로 북괴라는 용어 및 호칭, 김일성이라는 호칭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가 북한 괴뢰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남조선 괴뢰라고 하는 용어를 다른 좋은 표현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지영 기자 zo2zo2zo2@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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