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입니다만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4. 7. 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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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선생님! 여기 좀 와보세요. 빨리요!” 나보다 먼저 집으로 들어갔던 최 간호사님이 다급히 부른다. 허겁지겁 달려갔다. 화장실 구석에 박 할아버지가 주저앉아 있다. ‘악’ 소리 한번 지르지도 못한 채 한 손으로 겨우 문지방을 잡고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널브러졌다. 안방에 있던 할머니를 불렀지만, 그 상황에서도 화장실까지 곧장 오지 못했다. 급한 대로 할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앉히고 몇가지 신경학적 검사를 했다. 큰 이상은 없다. 다행이었다.

“이발소에서 쓰러져 119 부른 적도 있어. 이발소 의자가 높잖아. 거기서 일어서서 내려오는데 그냥 쓰러졌어.” 할머니에 따르면 이런 일이 올해에만 벌써 수십번이다. 그중 두번은 머리에 피가 났고 한번은 갈비뼈가 부러졌다. 원인은 기립성 저혈압 때문이다. 할아버지처럼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환자 셋 중 한명꼴로 기립성 저혈압이 생긴다. 앉았다 일어날 때 혈압이 뚝 떨어지면서 어지러워져 넘어지고 심하면 쓰러지기도 한다.

우리가 마침 그곳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평소처럼 두분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할머니는 무릎 관절염이 심하고 허리도 많이 굽었다. 안방에서 화장실까지 오는 데도 벽의 안전 바를 붙들어야 한다. 성인 걸음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속도로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이동했다. 그런 할머니가 어떻게 당신 키의 1.5배나 되는 할아버지를 혼자 일으켜 세워 휠체어에 앉힐까. 초인적인 힘을 쥐어짜내야만 할 수 있는 일인데 그걸 작년까지만 해도 해냈다. 정말 슈퍼히어로가 따로 없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는 기역자로 굽은 자신의 허리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제 할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쓰러지면 할머니는 그냥 옆에 앉아 있는다. 뚝 떨어졌던 혈압이 다시 정상화되어 할아버지가 정신이 들면 그제야 할아버지를 부축해 침대로 간다.

그날 저녁. 답답한 마음에 산책하러 나갔다. 멀리서 한 아이가 길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있다. ‘뭐지? 운동하다 어지러워졌나?’ 점점 가까이 걸어가는데 아이의 발 앞에 초록색 실 같은 뭔가가 꿈틀거린다. 더 가까이 다가가 봤다. 아, 애벌레다. 왕복 8차선 도로를 거동 불편한 노인이 무단횡단 하듯 느릿느릿 초록 애벌레 한마리가 산책로를 위태롭게 가로질러 가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자전거 때문에 혹시라도 벌레가 치일까 봐 걱정됐던 걸까. 아이는 애벌레가 산책로를 다 가로질러 갈 때까지 자기 몸으로 길 한귀퉁이를 가로막고 앉아 지켜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쓰러진 할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할머니를 떠올렸다. 신음조차 없는 그 침묵의 시간 동안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할까. 평생 함께 살아왔던 소중한 사람이 쓰러져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 이번에도 깨어날지, 아니면 이번에는 정말 깨어나지 못할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할아버지가 무사히 건너가기만을 지켜봐야만 하는 시간. 무기력을 견뎌내며 옆에 있어주는 일은 어떤 초능력자도 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어떤 초능력보다 귀한 사람의 능력.

할아버지를 주간보호센터에 맡겨보려고도 해봤지만 안 됐다. “시내에도 이용하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할아버지 한 사람 때문에 버스가 두시간을 왔다 갔다 할 순 없다는 거야. 요양보호사도 구해봤지만, 이곳 산골까지 와줄 사람이 없어.” 그런 하소연을 하는 할머니 본인도 노인장기요양 4등급으로 당장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걱정되어 돌봄의 공공 방임을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강원사회서비스원에 연락을 취했다. 인력이 부족해 파견이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

평범한 삶 자체가 초능력을 필요로 하는 현실에서 아픈 노인은 자주 초능력자가 된다. 아픈 노인에게 히어로가 되어주진 못할망정 노인 스스로 히어로가 되길 요구받는 사회. 그곳에서는 집집이 아픈 노인들이 문고리를 잡으며 방바닥을 엉덩이로 끌며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보행기를 붙들고 히어로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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