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파란 간판 빵집, 노조를 파괴하다

신다은 기자 2024. 7. 4.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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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토크]

골목마다 파란 간판을 단 빵집이 있습니다. 에스피씨(SPC)그룹의 프랜차이즈 빵집 ‘파리바게뜨’지요. 여기서 일하는 제빵기사들에겐 두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점심시간 1시간을 온전히 보장받는 것, 그리고 한 달에 적어도 6번 쉬는 것. 정규직에게 당연하게 보장되는 이 권리를 위해 이들은 목소리 높여 싸워야 했습니다.

빼앗긴 권리를 요구하다 노동법에 눈떴고, 스스로가 하청업체 직원이 아닌 본사 정규직으로 고용됐어야 한단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2017년 한 해를 뜨겁게 싸웠으나 결국 회사가 원했던 자회사 고용에 합의해야 했어요. 남은 투쟁은 노조를 통해 지속하자고, 그렇게 파리바게뜨 최초의 제빵기사 노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대가는 비쌌습니다. SPC그룹 전체가 동원돼 노조 죽이기에 나섰습니다. 조합원들에게 탈퇴를 종용하고 승진 차별로 협박도 했고요. 노조 하는 사람을 조직 부적응자로 몰고 악의적 소문을 냈습니다. 회사에 협조적인 노조를 따로 세워 교섭권을 그쪽에만 몰아줬죠. 조합원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가고 노조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습니다. SPC그룹 허영인 회장과 황재복 피비파트너즈 대표는 노조 파괴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기사 보기☞파리바게뜨 제빵사들, 7년 만에 ‘최종 보스’ 만나다)

노조파괴의 가장 큰 고통은 연대해야 할 노동자들끼리 분열하고 갈등한다는 점입니다. 어제까지 함께 힘을 모았던 동료가 회사 압박에 못 이겨 등 돌리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됩니다. 모두의 권리 향상을 위해 싸운 노조 간부들은 시위꾼으로 매도당하고 맙니다. “노조파괴로 인간관계가 다 파탄 나는” 게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고 피해자들은 말합니다.

미디어가 그려내는 ‘귀족노조’ 이미지와는 달리, 노조는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의 마지막 돌파구입니다. 아프고 병들게 만드는 노동환경과 상습적 임금체불, 비정규직 불법 파견을 바로잡을 유일한 창구입니다. 노동법 의무를 버젓이 무시하는 사업주에게 ‘법 좀 지키라’고 말할 확성기입니다. 조합원들이 사쪽의 온갖 감시와 협박을 견디면서도 노조를 만들고 지키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만든 노조가 ‘보기 싫다’는 사장님 말 한마디로 정리됩니다. 그룹사 간부들이 모세혈관처럼 전국의 관리자들을 동원해 노조 탈퇴 작업을 벌이고요. 오직 민주노조를 고사시킬 목적으로 어용노조를 세우고 지원합니다. 법과 제도가 이를 용인하는 정도를 넘어 부추깁니다. 늑장 수사 역시 증거인멸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렇게 점점 쪼그라든 노조는 점차 “소멸돼가는 것 외에 아무런 선택지가 없”(임종린 파리바게뜨지회장)게 됩니다. (기사 보기☞ 노조파괴 ‘흑막’에 회장님 있었다)

사쪽의 집요한 노조파괴 공작을 지켜본 한 노조 활동가는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사측이 노조를 파괴하는 이유가 파업 등 금전적 손익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물불 안 가리고 노조파괴한다는 건 뭐랄까, 경영진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걸 못 견디는 게 아닐까….”

사용자가 노조 가입을 이유로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고 노조 활동에 개입하는 행위를 ‘부당노동행위’라고 합니다.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부정하는 중대범죄죠. 그런데 법정 최고형은 고작 2년에 불과합니다. 범죄자들은 조직의 옹위를 받으며 도리어 승진합니다. 수사는 1년씩 끌다가 말단만 기소한 채 끝납니다. 남은 것은 조합원을 잃고 사내 괴롭힘을 견디는 노조 간부 한두 명, 그리고 ‘회사에 목소리 내면 보복당한다’는 무서운 교훈입니다.

피해자들은 부당노동행위도 중대재해처벌법만큼이나 노동부가 전문적인 수사팀을 꾸려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범죄가 은밀하게 이뤄지고 증거인멸 가능성이 크며, 한번 발생하면 피해를 회복하기 어려워서죠. 그리고 국민에게도 노조파괴라는 범죄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합니다. 최소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세운 노조가, 가장 비인간적으로 파괴되는 현실을 봐달라는 것이죠.(기사 보기☞ SPC 노조들 싸움? 알고보니 ‘그 노조’ 정체는…)

제22대 국회에서 노란봉투법이 다시 발의됐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 모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목소리 내는 이들을 보호할, 또 다른 피해자를 막을 기회 말입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1519호 한겨레21 다시보기☞파리바게뜨 제빵사들, 7년 만에 ‘최종 보스’ 만나다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695.html

노조파괴 ‘흑막’에 회장님 있었다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696.htmlSPC

노조들 싸움? 알고보니 ‘그 노조’ 정체는…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6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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