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도움은 가까운 곳에 있지 않다

경기일보 2024. 7. 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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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부터 필자는 서울지역 몇 곳의 가정폭력상담소에서 피해자 상담을 하고 있다.

현재도 집단상담을 통해 여러 피해자를 만나는 중이다.

피해자는 관계에 대해 너무 많은 고려를 하면서 폭력을 은폐하고 침묵하는 기간을 거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다.

피해자는 가까운 곳에는 도움이 없다는 것을, 도움은 지금까지 가장 멀게 느껴졌던 곳,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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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찬 인하대 사회복지학 초빙교수·전 서울시자살예방센터장

10여년 전부터 필자는 서울지역 몇 곳의 가정폭력상담소에서 피해자 상담을 하고 있다. 현재도 집단상담을 통해 여러 피해자를 만나는 중이다. 폭력의 다차원적 속성에 대해서는 이미 학자들이 권력관계, 사회시스템 측면에서 계보학, 위상학, 문화인류학 등의 방식으로 정리한 바 있다. 현장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직접 만나온 필자는 기호학적(언어적 상호작용과 상징 체계) 측면에서 폭력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대개 가해자는 자신에 대한 간섭, 개입, 자극 등을 금지, 불허하는 표현과 상징을 많이 사용하고 자신의 원가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원가족에 대한 언급은 결국 가해자 자신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고 인식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가족구성원에게 다양한 경계를 설정하고 이를 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가해자가 설정하고 있는 금기들은 가족인 이상 넘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오직 이해와 수용만을 원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든 문제 삼지 말라는 가해자의 까다로운 조건을 맞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폭력이 발생하는 맥락에서 가해자는 피해자의 정체성을 일종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함부로 해도 되는 ‘예외 상태’에 있는 존재를 뜻하는 말)’로 상정한다. 즉, 생명을 가진 존재이지만 자신을 자극하는 이상 존엄한 존재로 대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를 철저히 타자화하고 전근대적 순종을 요구하는 권력관계만 남는다. 물론 가해자는 가족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을 철저히 숨긴다. 가장 예민하고 쉽게 격정에 휩싸이는 사람이 가장 낙천적이고 주변 상황에 좀처럼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한다.

이러한 폭력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가해자는 원치 않는 자극(간섭, 듣고 싶지 않은 말, 자신을 수용하지 않는 모습 등)을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을 핍박받는 순교자라 여긴다. 자신은 그러한 죄를 응징하고 교화하는 차원에서 부득불 폭력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가해자의 망상적 인식에 가해자의 원가족, 심지어 피해자의 가족, 주변 지인들이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는 관계에 대해 너무 많은 고려를 하면서 폭력을 은폐하고 침묵하는 기간을 거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다. 피해자는 가까운 곳에는 도움이 없다는 것을, 도움은 지금까지 가장 멀게 느껴졌던 곳,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실제로 피해자는 공공 기관의 도움을 받으면서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에게 죄가 있고 이러한 죄를 세상에 공개해야만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다만 독립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법률적인 문제 외에도 자녀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독립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피해자에 대한 심리 지원을 넘어 주거, 일자리, 자녀 돌봄 등을 통합한 현실적인 지원이 더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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