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학- 철학실종시대, 사라진 강원 동학사를 찾아서] 6. 강원 동학군의 항일투쟁, 일본 군화에 짓밟히다

김진형 2024. 7. 4. 00: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위령탑 하나 못 세운 투쟁… 쓸쓸한 동학의 혼 위로
동학군 4000명 정선·평창 집결 군수 도주
강릉관아 재공격 준비 관군·민보군 대치
강원감영 중군·일본군 합류 연달아 패배
사료 부족 강원동학군 전투지 확인 불가
전적지 안내문 없고 봉분 추정지 훼손
동학 은폐 분위기 인민군 무덤 오인도

화절령

-강기희



꽃 꺾다 울던 동학군

꽃 꺾으며 웃던 일본군

눈물의 꽃 너는 아니

너는 아니 웃음의 꽃



군인들이 넘으며 꽃 꺾다 웃던

누이들이 넘으며 꽃 꺾다 울던

너는 아니 희망의 꽃

절망의 꽃 너는 아니



꽃 꺾다 웃던

꽃 꺾으며 울던



 

지난해 별세한 정선 출신 강기희 작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우린 더 뜨거울 수 있었다’에 실린 시. 정선의 고개 지명인 ‘화절령’의 이름을 빌려 동학군 역사를 조명했다. 이 시는 시노래 가수 박경하의 음악으로도 만들어졌다. 강 작가는 소설집 ‘양아치가 죽었다’에서 단편 ‘북소리’를 통해 정선 동학군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정선군농민회와 함께 정선동학농민군 추모제를 직접 주관했던 그는 강원도 동학혁명기념관이 만들어지길 기원했었다.
 

▲ 평창 후평리 동학군 전사자의 유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묘. 이전에는 봉분이 훨씬 컸다고 한다

강원 남부지역에서 펼쳐진 동학군의 전투 양상을 확인하기 전에 다시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일본군과의 관계다. 강원 동학군은 평창에서 일본군, 관군과 전투를 치르며 항일투쟁을 벌였으나 그 역사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강원 동학군과 일본군 간 연관 자료가 적고, 국내 연구도 미진한 실정이다. 청일전쟁이 확전되던 당시 일본군은 강원 동학군이 러시아로 이동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이들을 진압했을 것으로 보인다. 강원 동학군의 피해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 무참히 학살된 동학군의 무덤은 강원 곳곳에 쓸쓸히 방치돼 있다. 본지가 최근 동학군의 묘로 추정되는 평창 산자락을 찾았으나, 이들의 혼을 달랜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 평창에서 정선으로… 반복되는 참극

동학군은 10월 20일쯤 평창과 정선에 몰려들기 시작한다. ‘동비토론’에 따르면 당시 정선에는 3000명, 평창에는 1000명 가량의 동학군이 모였다고 한다. 당시 정선의 동학군을 이끈 인물은 충북 제천의 청풍대접주로 불렸던 성두환이었다. 동학군이 정선읍 녹도에 집결하자 정선군수는 도주했으며 동학군은 이방의 머리를 베고 강릉 관아를 겨냥한 재공격 준비에 돌입했다. 정선 동학 지도자인 지왈길과 이중집은 강릉 임계지역 부자들을 잡아들여 재물을 탈취하기도 했다.

선교장 주인 이회원과 강릉 경방의 최윤정을 중심으로 한 관군과 민보군도 10월 22일쯤 이진석을 중군장으로 삼아 동학군 토벌에 본격 나선다. 10월 26일 평창 봉평 포수대장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은 동학군과 접전을 벌였고 7명을 사로잡아 총살했다. 동학군은 10월 말 평창 흥정리(현 원길리 367 일대) 사리평에서 전투를 치렀으나 패했고, 흥정계곡을 넘어 홍천으로 퇴각했다. 일부 증언에서는 여기에서 40여명이 사살됐다고 한다.

11월 1일 원주 강원감영이 중군을 보냈고, 같은 달 3일에는 일본 이시모리 대위가 인솔하는 서울수비대 18대대와 19대대 동로군 등 일본군 2개 중대가 평창 운교참에 도착했다. 5일 평창읍 후평리에서 이시모리 부대와 관군은 동학군 3000명과 2시간에 걸친 접전을 벌였다. 죽창으로 무장하고 후평리에 주둔했던 동학군은 주로 제천 등 외지인으로 구성됐던 탓에 지역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다. 앞에서는 일본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산 뒤쪽에서 들어오는 관군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1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평창 동학군은 노성산을 거쳐 정선으로 이동했다.

관군과 일본군도 곧장 정선으로 향했다. 11월 6일 이진석의 부대는 정선에서 동학군 10명을 죽이고 접사 이중집 등 5명을 체포해 강릉으로 압송, 11월 22일 현 강릉 해람중 자리에서 효수했다. 비슷한 때 지왈길이 이끄는 정선 녹도의 동학군도 이시모리 대위의 일본군과 관군에게 크게 패했다. 지왈길은 11월 23일 체포돼 25일 녹도에서 효수됐다. 많은 동학군이 체포되거나 사살됐고 이후 정선의 동학군 활동은 급속히 위축됐다.
 

▲  동학군의 주둔지로 추정되는 평창 평창읍 후평리의 산길. 관군이 동학군의 뒤를 쳤던 길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름과 무덤조차 기록되지 못한 죽음들

평창의 동학군 전투지 위치는 사료 부족 탓에 정확히 찾기 어렵다. 기념사업은 커녕 동학 표지판과 비석조차 없다. 강릉 선교장과 대도호부 관아, 처형장이 있었던 강릉 해람중 자리에도 동학에 대한 안내문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지역의 문화해설사들도 관련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이번 취재에서 평창지역 향토사학자 정원대 씨의 도움을 받아 평창 후평리 전적지 동학군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처음 찾았다. 평창읍 서동로 2312 인근이다. 전적지 인근 봉분은 시간이 지나 흙이 많이 떠내려가고 훼손된 모습이었으나, 크기로 미뤄봤을 때 최소 수십 명을 함께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들도 이곳을 한국전쟁 때 인민군을 묻었던 장소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정원대 향토사학자는 “동학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지역 분위기 속에 동학군의 묘가 인민군의 무덤으로 오인된 것으로 보인다”며 “강원 동학군들은 여전히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투는 주로 산에서 이뤄졌고 관군은 동학군의 아들과 부인 등을 모두 죽이고 땅에 묻었다. 지역 사람들이 그나마 양지 바른 곳에 봉분을 크게 만들었다”며 “위령탑 하나도 세우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라고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도 “아무리 강원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중요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시적으로 알리려면 안내표지판과 표지석 설치부터 필요하다”고 했다. 김진형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동학군 #항일투쟁 #일본군 #철학실종시대 #사라진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