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쉴 틈 궁리

기자 2024. 7. 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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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무르익으니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이 흘러 이 장마가 지나면 곧 휴가철이다. 자연스럽게 요사이 스몰 토크의 단골 주제는 날씨와 휴가. 휴가 계획들 세우셨는지.

나는 휴가에 꽤 진심인 편이었다. 이왕이면 이국으로 떠나려 했고, 가능한 한 휴일까지 붙여 최대한 길게 다녀오려 부단히 애썼다.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기 아까워 촘촘히 계획을 짰고, 무언가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 두어 가지 대안도 준비했다. 그러니 휴가 한 번 다녀올 때면 재충전은 무슨, 방전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는데 얼마간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휴가란 얼마나 귀한가. 귀한 만큼 빈틈없이 보내야 옳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 휴가차 떠난 여행에서 ‘한국인만 가능한 일정’이라고 설명이 따라붙는 현지 투어들을 적잖게 마주했다. 휴가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국인이지, 암.

우리가 휴가를 맹렬히 보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휴가는 산업사회,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 접어들면서 나온 개념이다. 농경사회이고 신분사회였을 때 보통 사람들에겐 휴가는커녕 휴일도 없었다. 우리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휴가는 오랫동안 귀족이나 부르주아에게만 허락됐다. 기술 발전으로 인한 노동시간 단축, 소득 향상, 기본권 신장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사회적 환경 변화에 따라 근대 여가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실상 여가는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발현됐고, 여가 보장의 제도적 실현으로 휴가가 도입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부 기업에서 별도의 여름휴가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여름휴가는 법정 의무사항이 아니다. 대개 연차유급휴가를 한여름에 5일 이상 붙여 쓸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 휴가의 전형이다. 여기엔 생산성 제고, 에너지 절약, 지역경제 활성화 등의 대의명분이 뒤따라 휴가엔 얼마간 강제성도 발효된다. 통제된 조건 속에서 휴가는 적극 사용해야 할 대상이 됐고, 비일상성에 기반한 여행이 일반적인 휴가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맥락 속에서 적어도 남들 가는 데는 갔다와줘야 면이 서는가 하면, 그 휴가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색다른 경험을 했는지가 휴가를 얼마나 잘 보냈는지로 치환되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언제부터인가 어디로 휴가를 떠날지 결정하는 것만으로 진이 빠지더라니.

전력을 다했던 휴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무렵 한 친구의 휴가가 내게는 전환의 계기가 됐다. 몇해 전 그해 휴가를 앞두고 친구가 연락을 해왔더랬다. 그가 떠나려는 곳으로 수차례 취재여행을 다녀온 내게 어디 어디를 둘러보면 좋을지, 무엇을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나는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다 훈수를 두면서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그냥 좀 쉬어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하다. 이미 다 경험해본 자의 거들먹거림이었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좀 지쳐 있었다는 그는 실은 그 말이 듣고 싶었다고 속마음을 터놨다. 약간은 신이 난 듯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낮잠도 자고, 그림도 좀 그려볼까 한다고 말을 보태는 그에게 “좋다! 내가 살게 그 그림. 예약!”이라고 말한 것은 무안한 티를 감추고 싶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친구는 웃겨 죽겠다며 깔깔거렸다.

친구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된 것은 반년쯤 지난 겨울이었다. 모처럼 얼굴을 보자고 한 날에 친구가 “좀 늦었습니다만 예약하신 것 전해드립니다” 하고 내민 것이 있으니, 캔버스였다. 그림을 사겠다고 한 내 말이 농담이란 걸 몰랐을 리 없는 친구가 기어코 그려온 그림에는 휴가를 보낸 그곳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곤 했다는 나무가 초록의 움을 틔우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그 휴가가 어땠는지 묻지 않았다. 그 그림을 휴가의 전리품으로 간직하지 않고 내게 선물해준 것으로 많은 것이 설명됐으니까.

그 후로 휴가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곱씹는 것이 있다. 쉴 휴(休)에 틈 가(暇) 자가 붙어 ‘휴가’라는 것. 올해 역시나 휴가를 앞두고 어떻게 하면 잘 쉬었다고 소문이 날지 궁리 중인 나는 여전히 휴가에 진심이다.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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