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 칼럼]여권발 ‘핵무장 논의’의 공허함

서의동 기자 2024. 7. 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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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가능성이 커지면서 여권 일각에서 핵무장론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트럼프가 집권하면 북한 핵을 묵인하는 방향으로 북·미가 타협할 것이고,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도 있어 안보 불안이 커진다는 가정이 주된 전제다. 그러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핵개발을 이처럼 떠들썩하게 공론화할 일인지 의문이 든다. 어느 나라건 핵개발은 극비리에 추진돼왔기 때문이다. 북한, 인도,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도 핵개발 착수부터 알제리에서 핵실험을 마칠 때까지 십수년간 비밀을 유지했다. 미국이 눈치를 챘지만 샤를 드골 대통령이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기 전까지는 공론화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책임자인 당시 경제수석 오원철은 1972년 초 핵개발에 착수할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등 7개 연구기관에 과제를 분산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퍼즐조각처럼 분산된 연구과제를 일일이 끼워 맞춰보지 않으면 핵개발임을 알기 어렵도록 했던 것이다. 1971년 주한미군 7사단 철수로 한·미관계가 악화되자 미국은 정보기관을 동원해 한국의 핵개발을 감시했다. 한국이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와 교섭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하자 미국은 한국에 반입되는 국방 관련 기자재를 죄다 뒤졌으며, 프랑스에 압력을 넣어 재처리시설 판매를 막았다. 미국의 압박이 최고조에 달한 1976년 말 박정희는 핵개발을 일단 멈췄다. 그러나 이듬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2사단과 전술핵무기 일부 철수를 발표하자 핵개발은 재개됐고, 박정희가 비극적 최후를 맞을 때까지 비밀리에 지속됐다. 이 모든 것이 강력한 권위주의적 동원 체제를 구축했던 박정희 정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박정희조차 시종 미국과 ‘숨바꼭질’을 벌여야 했고, 끝내 실패했다.

정치학자 에텔 솔린젠은 자급자족적이고 국영기업이 많으며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내향형(inward-looking) 국가가 핵개발에 적합하고, 국제화된 국가(internationalizing model)는 부적합하다고 분류했다. 북한이 핵개발에 최적인 반면 경제개방도가 높은 한국은 매우 어렵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핵개발 추진에 부적합하다. 우선 박정희 시대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개방성·투명성이 높다. 윤석열 정부가 ‘입틀막’식 권위주의 행태를 보이지만 강력한 야당이 버티고 있다. 5년마다 대통령이 바뀌는 권력구조도 비밀 프로젝트를 뚝심 있게 끌고 가기 부적합한 거버넌스다. 박정희 시대처럼 권력이 비밀리에 인력과 자금을 동원할 수도 없다. 박정희 영구집권 체제 하의 관료들이 지녔던 충성심과 사명감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곤욕을 치르는 지금 관료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사용후 핵연료 처분장 부지도 못 구하는데 비밀 핵실험장은 또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내전(內戰) 상태에 버금가는 정치지형을 감안하면 윤석열 정부가 아니라 어떤 정부하에서도 비밀 핵개발은 기대난망이다.

그럼에도 한국이 핵개발을 강행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신청하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러시아가 경제제재에 나설 것이다. 미국이 ‘비핵화 레짐(regime)’을 깨면서까지 한국 편을 들 가능성은 낮다. 제재가 시작되면 원전 가동에 필요한 핵연료 수입이 끊겨 전력난을 겪게 된다. 핵연료 비축분으로 당분간은 견딘다 쳐도 수출·금융제재는 어떻게 버틸 건가. 설사 미국이 안보리 제재에 거부권을 발동한다고 해도, 중국이 독자 제재에 나선다면 핵심 소재를 중국에 의존하는 자동차·2차전지·화학·조선 등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이 질식하게 된다.

더 문제는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을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으니 핵무기를 개발하더라도 그 통제권을 한국이 갖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핵무장을 말하기 전에 전작권 환수를 주장하는 게 순서다.

‘말도 못 꺼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핵무장 공론화는 ‘긁어 부스럼’이다. 지난해 1월 윤석열 대통령이 “북핵 문제가 심각해지면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하자 4월 미국은 ‘워싱턴선언’에 한국의 NPT 회원국 의무를 강조하는 문구를 넣었다. 한국의 핵무장을 막겠다는 경고였다. 보수들은 핵무장에 담긴 ‘충심’을 강조하고 싶겠지만, 어설픈 공론화는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요구액을 높이는 부작용만 가져올 공산이 크다. 한국의 핵무장은 ‘북한 비핵화’만큼 어렵다.

서의동 논설실장

서의동 논설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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