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화가 폴 고갱 이야기

권상인 ㈔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예술학박사 2024. 7. 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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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에 묘사된 구도자같은 고갱 면모
실제 그의 삶과 죽음은 그닥 고고하지 않았다
권상인 ㈔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예술학박사

영국 소설가 윌리엄 서머싯 몸(1874~1965)은 1919년 발표한 소설 ‘달과 6펜스’에서 프랑스 화가 폴 고갱(1848~1903)을 구도자로 한껏 치켜세웠다. 말하자면 고갱이 프랑스령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서 가장 큰 섬 타히티를 찾아가 10여 년 생활하며 그림 그린 것을 어떤 신비로운 열반의 철학적 개념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정작 고갱 이력의 면면을 놓고 그 기록을 고찰하면 그의 인생살이에서 삶의 방법이 지성인답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가 35세 되던 1883년,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주식 중개인이란 안정된 직업을 하루아침에 걷어차 버린 것은 참으로 무모하게 보인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감행할 수 없는 행동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의무보다 더 다급한 큰 문제가 그의 신변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 1888년 그려진 작품 ‘야곱과 천사의 싸움’과 1889년 작품 ‘황색 그리스도’에 표현된 이미지는 고갱 자신이 숙연히 기독교에 귀의해 무언가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벗고자 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 이듬해 작품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화면 속의 도자기 항아리에 그려진 악마 같은 얼굴을 분석하면 고갱을 괴롭히는 어떤 존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즉, 그의 어떤 심리적 착란상태를 그린 것으로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구원의 간절한 기도로 보인다. 이러한 고갱의 심상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문명의 세상을 하직하고 먼 외딴섬으로 도피하고 싶어 하는 충동을 엿볼 수 있다.

마침내 고갱은 1891년 문명 세계를 뒤로하고 타히티로 떠난다. 그리고 타히티섬 북쪽의 행정중심지 파페에테에서 서남쪽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45㎞ 떨어진 마타이에아라는 마을에 작은 오두막집을 구해 화실을 만들었다. 자리가 잡히자 영국인 아버지와 폴리네시아 토인 사이에서 태어난 10대 초반 티티란 소녀와 함께 살았다. 고갱이 빈털터리 백인인 것을 알아챈 티티가 말없이 사라져 다시 토인인 데프라와 함께 살게 된다. 데프라는 고갱이 타히티라는 낯선 섬에서 정을 붙이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된 착한 10대 초반의 소녀였다.

이런 환경에서 그려진 고갱 그림은 지난날 프랑스 브르타뉴 시절에 그렸던 환상적이고 구성의 의도가 뚜렷한 그림에 비하면, 타히티의 열대 숲과 그곳 사람들의 순박한 일상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낸 새로운 작풍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1893년까지 2년간에 걸쳐 66점의 그림과 타히티의 전통 조각을 닮아 야만스럽게 보이는 목 조각 몇 점을 완성했으나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앓고 있던 병이 도져 마침내 쓰러졌다. 그해 8월 치료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타히티에서 가져온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고 또 자바섬 출신인 새로운 여인 안나와 동거 생활을 했다. 1895년 3월 타히티의 데프라를 만나기 위해 다시 타히티에 갔으나 데프라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있었다. 고갱은 파페에테에서 서쪽으로 10㎞쯤 떨어진 푸나위아란 동네에 타히티식 오두막집을 짓고 또 다른 토인 처녀 파프라와 함께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때 그린 ‘망고의 여인’ ‘향기로운 나날’ ‘꿈’ 등 걸작들로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후기인상파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또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듯한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문학적이며 철학적 작품 명제는 자기 인생에 대한 화두로 보인다. 이 그림 앞에 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되돌아보게 된다.

1901년 그는 지병으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망감으로 타히티섬에서 동북쪽으로 1200㎞나 떨어진 마르케사스 제도의 히바오아 섬으로 옮겨간다. 자존심이 남달리 높았던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기의 부끄러운 지병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903년 5월 8일 아침 시간 히바오아에서 고갱의 새로운 아내, 14세의 카피가 숨 가쁘게 섬의 선교사 집 문을 울며 두드렸다. “선교사님 빨리 우리 집에 와주세요! 오늘 아침 백인 남편이 숨을 쉬지 않아요!” 이 교회의 선교사는 히바오아 섬에서 고갱의 평소 행동을 공격해 고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선교사가 달려서 고갱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을 거둔 고갱의 몸엔 아직 온기가 있었고 두 눈은 짓물러 장님이 돼 있었다.


서머싯 몸은 ‘달과 6펜스’ 마지막 장에서 고갱의 지병을 문둥병이라 했으며 타히티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미술사적 자료들을 종합하면 고갱은 법정전염병 제3종에 해당하는 매독으로 히바오아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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