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건전재정 타령 [뉴스룸에서]
김경락 | 경제산업부장
박근혜 정부는 ‘걷기’에 이골이 난 정부였다. 재임 동안 조세부담률을 2%포인트 가까이 끌어올렸다. 이유가 있다. 일단 박근혜 정부는 대규모 감세로 홀쭉해진 나라 곳간을 물려받았다. 집권하자마자 세입경정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한 건 그런 까닭에서였다. 증세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세수 부족이 불러온 난감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다름 아닌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다. 그는 당시 기획재정부 1차관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세수 확충에 힘쓴 건 ‘재정 건전성 확보’라는 재정 보수주의에 입각한 신념도 크게 작용했다. 박근혜 정부는 편법이 아닌 ‘정석’에 입각한 증세 전략을 짰다. 3대 세목에 포함되는 법인세와 소득세에 증세가 집중된 게 그 예다. ‘보편 증세’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중견기업과 중산층까지 증세 대상을 넓혔다. ‘부자 증세’만 외치며 실제론 찔끔 증세만 추구한 민주당의 주장보다 더 앞서나갔다.
당시 관가 일각에선 조세 저항을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실제 박근혜 정부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인 조원동씨는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경질 위기까지 몰렸으며, 집권 3년차인 2015년은 새해 벽두부터 야당의 ‘월급쟁이 털기 증세’란 파상 공세에 마주해야 했다. 훗날 어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최서원 등의 국정농단이 결정타였으나 공격적 증세에 따라 누적된 민심 이반도 바탕에 깔려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하튼 재정 보수주의에 입각한 박근혜 정부의 재정 전략은 ‘보수 정부’라는 이름에 걸맞은 결정이며 국민을 기만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뒤이어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쓰기’에 좀 더 무게를 실었다. 집권 첫 예산안부터 예산(총지출 기준) 증가율을 9%로 올려 잡았다. 경상성장률 수준의 예산 증가율이면 통상 ‘균형 예산’이라고 보는데 이를 크게 뛰어넘은 공격적인 예산 편성이었다. 이후에도 지출 총량은 빠르게 불어났다. 이는 전임 정부의 세제 개편 효과와 경기 회복에 따른 초과 세수(예상보다 더 들어온 세수)가 이어진 덕이었다. 초저금리 상황도 지출 확대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집권 중반 들이닥친 코로나19 대위기도 지출 증가의 주된 배경으로 빼놓을 수 없다.
이런 객관적 여건과는 별개로 문재인 정부가 ‘진보 정부’로서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재정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에 지출이 늘어난 것이기도 하다. 소득 격차를 줄이고 장기 저성장을 탈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정 확대 전략을 채택한 건 ‘건전성 강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진보 정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런 지출 확대가 저항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태초에 조세 저항은 있어도 지출 저항은 없다. 조금 비틀면 지출 확대는 달콤하기에 자칫 포퓰리즘으로 흐를 위험이 노정돼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여하튼 앞선 두 정부는 각자의 정체성에 맞는 재정 전략을 택했다. 현 정부는 어떠한가. 나는 ‘건전 재정’이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정책 기조 중 가장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처럼 보수 정부로서의 정체성에 맞게 재정 건전성의 고삐를 잡으려는 의도는 납득할 수 있다. 문제는 ‘건전 재정’이란 기조가 기만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실제 운용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잇따른 감세 정책과 수입·지출을 동시에 맞춰야 하는 건전 재정은 양립하기 어렵다. 씀씀이를 줄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착각이다. 전체 지출의 절반 이상이 ‘의무지출’인 재정 구조에서 정부 재량으로 줄일 수 있는 지출은 그리 많지 않으며, 여기에 가속화하는 고령화 탓에 의무지출 급증이 불가피함을 정부 자신도 인정하지 않는가. 연구·개발 예산을 크게 줄였다 1년 만에 복원시킨 건, 의무지출이 아닌 지출도 정부의 재량 행사가 여의치 않다는 걸 보여준다.
건전성 확보는커녕 감세 정책에서 비롯된 세수 기반 붕괴 양상은 불안감마저 키운다. 2년 연속 대규모 세수 결손(예상보다 세수가 안 들어오는 현상)은 정부의 예측 능력 부족으로 넘길 수 있지만 경제가 역성장하지 않음에도 세수 자체가 전년보다 감소하는 건 위기의 징후다. 행여 세금을 깎아주면 바닥을 기는 국정지지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재정 위기를 방치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이대로라면 입으론 ‘건전성’을 부르짖으면서 정작 나라 곳간을 역대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정부가 될 수 있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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