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와 싸운 사람 [크리틱]

한겨레 2024. 7. 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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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미국 작가 필립 로스는 '뉴요커'에 '위키피디아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위키피디아가 작가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싣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에는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2000)의 주인공이 아나톨 브로야드를 모델로 했다고 적혀 있었다.

로스는 이 문제만큼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위키피디아에 수정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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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 1980년대.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2012년 미국 작가 필립 로스는 ‘뉴요커’에 ‘위키피디아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위키피디아가 작가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싣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에는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2000)의 주인공이 아나톨 브로야드를 모델로 했다고 적혀 있었다. 브로야드는 자기 부모가 흑인임을 평생 숨겼던 작가이다. 로스로서는 황당한 얘기였다. 왜냐하면 그가 염두에 둔 모델은, 굳이 밝힌 적은 없지만 사회학자 멜빈 튜민이었기 때문이다. 로스는 이 문제만큼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위키피디아에 수정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로스는 상당히 짜증이 나게 된다. 위키피디아가 수정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로야드 설’은 이미 열다섯 개의 전거(간행물)가 기록되어 있었다. 로스가 주장하는 ‘튜민 설’은 당연히 간행된 전거가 없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전거를 가지고 오시죠.”

맹랑한 추측성 기사들이, 활자화되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전거 취급을 받으며 창작자 자신보다 권위를 갖는 사태에 로스는 충격을 받았다. 분노에 찬 공개서한에서 로스가 말한 것은 두 가지이다. 1. 이건 작가인 내가 가장 잘 안다. 2. 그것은 경청될 필요가 있다. 이 주장이 크게 공감을 얻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쟁의 실익에 의문을 가졌으며 당시 79살인 로스가 역시 인터넷에 적응하기 힘든 건가 생각했다. 위키피디아는 ‘이건 내가 당사자라서 아는데’ 식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전거는 필수적이다. 전거가 신빙성이 있느냐는 검증도 일단 전거가 존재한 다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뿐 아니라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여기는 모든 지식의 영역이 그러할 것이다.

언젠가 움베르토 에코는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작품과 독자 사이의 소통에 작가는 괜히 끼어들지 말고 물러나 있으라는 뜻이다. 물론 이건 원칙론이며, 현실에서 작가는 작품의 의도를 묻는 질문에 답하거나 오해를 해명하는 일들이 수시로 생긴다. 하지만 이때도 작가는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게 참고 의견을 말하는 정도에 그쳐야지, 어떤 해석은 완전히 틀렸다거나 더 이상 이에 대해 논하지 말라고 통보하는 식으로는 할 수 없다. 내가 썼으니 가장 잘 안다고 말하는 건 작가라는 직업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책을 읽고 생각한 것이 과연 맞는지 작가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판정을 받아야 한다면 그런 귀찮은 것을 돈 주고 사서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사건을 조금 다르게 봐도 좋을 것 같다. 요점은 공개서한이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지금 위키피디아에서 ‘휴먼 스테인’을 검색하면 ‘튜민 설'이 ‘브로야드 설’보다 앞에 나온다. 튜민 설의 전거는 물론 로스의 공개서한이다. 결국 로스는 이상한 방식으로 위키피디아의 요구를 충족시킨 것이다. 위키피디아의 규칙은 이러했다. 1. 그 작품의 작가라 해도 우월한 지위는 인정되지 않는다. 2. 할 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어딘가에 기고를 하라. 로스는 얌전히 굴복한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막힌 일을 당했다’는 분노를 가장 앞에 내세웠다. 그가 자신을 지식 권력 위키피디아에 맞서는 인간으로 묘사한 선명한 구도는 게재지 ‘뉴요커’를 즐겁게 했을 것이다. 위키피디아로서는 로스가 그 글에 무슨 감정을 쏟아 냈든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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