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연애 말고 환승전국일주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한겨레 2024. 7. 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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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스틸컷. 사연 많은 한국과 일본의 두 가족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시작한 환승 여행.

이명석 | 문화비평가

“인터체인지 돌면 작은 정류소가 나와. 우리가 아는 그런 고속버스터미널이 아니야.” 나는 위성지도에서 캡처한 사진을 친구에게 보냈다. 시내버스 정류장보다도 몰골이 좋지 않은 나들목(IC) 정류장이다. 초조한 몇 분 뒤에 전화가 왔다. “으악! 큰일 날 뻔했어. 기사가 어디라고 말도 안 하고….” “어쨌든 내렸다는 거지? 이제 하루 세 번 있는 농어촌 버스를 타야 해.” “엥? 여기가 절 아니야?” “절이 왜 거기 있어?”

불교 덕후인 친구가 어쩌다 전국의 고승들을 인터뷰하는 일을 맡았다. 말하자면 성덕이 된 셈인데, 큰 문제가 있다. 이 친구는 차가 없는 뚜벅이인데 대부분의 절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엔 동행하던 기자도 없이 혼자 백두대간 어드메를 찾아가게 되었다. 다행인 점은, 나라는 친구가 최적의 대중교통 환승 경로를 찾는 데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대학 때 여름이면 무작정 전국일주를 떠나곤 했다. 당시 대학의 교지 편집실은 다른 학교 교지에서 찾아오면 언제든 숙박을 제공해 주는 전통이 있었다. 학교 근처의 자취방 하숙방은 감사했고, 편집실 귀퉁이의 군용 침대나 장의자로도 충분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파티나 이벤트가 열리는 게스트하우스가 인기라는데, 전국에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무료 게스트하우스가 깔려 있었던 거다.

숙박은 해결되었지만 교통은 어떻게? 가능한 한 저렴하게 움직이기 위해, 천천히 가고 돌아가고 무수히 갈아타는 환승의 여행을 해야 했다. 불편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지도앱, 지피에스(GPS), 인터넷 예매는 공상과학(SF) 영화 속 이야기고, 무작정 경유지로 간 뒤에 그곳 정류장에서 다음 노선을 결정한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도 그 불편함이 많은 생각을 일깨웠다. 나는 경부선을 타고 서울과 고향을 오가곤 했는데, 호남선에 접어들자 몹시 놀랐다. 호남선의 특급이 경부선의 완행 수준이었고 배차도 듬성듬성했다. 그쪽 친구에게 말했더니 사람 좋게 웃었다. “여기 인구가 적어서 그런가 보지.” 그도 나도 진짜 이유는 알고 있었다.

대학을 나와 외국을 돌아다니자 환승의 스케일도 달라졌다. 직항이면 8시간일 거리를 갈아타고 기다리며 24시간 넘게 돌아가기도 했다. 잡지에서 터키의 카파도키아 사진에 반해 기차와 버스와 배를 열두번쯤 갈아탄 뒤 도착하기도 했다. 목적지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경유지의 선착장에서 새벽 배를 기다리며 바이크 여행자들과 나눈 대화만큼은 아니었다.

“눈 감았다 뜨면 도착해 있는 게 제일 좋은 여행이야.” 나도 나이가 들며 직항과 자차의 편리함에 고개 숙이게 되었다. 오늘도 연예인들이 렌터카로 곳곳을 누비는 여행 콘텐츠를 보며 부러워했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내게 주어진 편리함이 아니라, 내가 겪은 불편함이 나를 만든다.

친구를 절에 보낸 뒤, 나는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낯선 동네의 중학교에 강의를 갔다. “여러분은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장소 중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없었나요? 심심할 때 거기 가는 방법을 인터넷으로 찾아봐요. 단 대중교통으로.” 환승 여행은 체력만이 아니라 지력을 극한으로 발휘해야 하는 게임이다. 기차, 고속버스, 시내버스, 도보 등 다채로운 옵션을 조합해야만 퍼즐이 완성된다. 교통수단만이 아니다. 환승하며 비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것도 큰 과제이자 재미다.

“이번 여름방학에 당장 떠나세요”라곤 말하지 못했다. 우선은 시뮬레이션만으로도 재미있을 거다. 수능에 문학과 비문학의 복합지문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문제일 거다. 그리고 언젠가의 여름엔 전국으로 세계로 인생으로 환승의 여행을 떠날 날이 오겠지.

인생이라는 여행은 직통보다는 환승 코스가 훨씬 많다. 원하는 대학에 단번에 들어가지 못할 때, 만족스럽지 못한 직장에서 헉헉대며 경력을 쌓을 때, 간발의 차로 기회를 놓친 뒤 언제 올지 모를 다음 기회를 기다릴 때, 각자가 겪었던 환승의 경험을 떠올리길 바란다. 엄빠가 모는 자동차 뒷자리에서 핸드폰을 만지다, 내리라면 내리고 타라면 타라는 여행은 영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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