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튀김 포대’로 빚은 여성 서비스직 노동자의 ‘기쁨과 슬픔’[인터뷰]

이영경 기자 2024. 7. 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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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 작가 신민 인터뷰
장대한 기골·성난 눈··
맥도날드 등서 일하며 느낀
‘웃는 얼굴’ 뒤 고달픔 담아
뒤통수 리본 ‘머리망’
여성 서비스직 노동자의 ‘유니폼’
“부당한 현실 상징한 오브제”
청년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의 애환을 강렬하고 풍자적으로 그려내는 신민 작가가 2일 서울 강남구 쾨닉 서울 갤러리에서 전시중인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냉동감자 포대는 땀흘려 일한 노동자의 피부 같아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노동력 표현하기 적합

맥도날드 냉동 감자포대로 만든 거대한 조각상. 잔뜩 화가 난 표정을 한 얼굴의 뒤통수에는 리본 달린 머리망이 달려 있다. 패스트푸드점, 커피숍에서 매일같이 마주하는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들이다. 신민 작가가 만든 조각들은 상냥하게 미소 짓는 ‘여성 서비스직 노동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거리가 멀다. 장대한 기골, 찌푸린 미간, 치켜뜬 눈썹, 어딘가 돌아있는 눈동자….

신민 작가의 작품을 한 번 보면 잊기 힘들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작품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대단하다. 요즘 말로 ‘미친 존재감’이다. 최근 열리는 전시에서 신민의 작품을 자주 만날 수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오는 7일까지 열리는 ‘능수능란한 관종’, 북서울미술관에서 8월4일까지 열리는 ‘소원을 말해봐’,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지난달 30일까지 열린 ‘버릴 것 없는 전시’, 서울 강남구 쾨닉 서울 갤러리에서 오는 27일까지 열리는 ‘Traces and Threads’에서 신민의 드로잉과 조각을 만날 수 있다.

신민의 작품은 맥도날드에서 태어나고 빚어졌다. 생계를 위해 맥도날드, 스타벅스 등에서 일하며 느낀 고달픔과 부당함이 작품의 주제가 됐고, 버려진 냉동 감자튀김 포대가 작품의 주재료가 됐다. 고된 노동이 끝난 후 버려진 포대를 집으로 가져와 포대종이를 겹겹으로 붙여 조각을 만들었다.

“전쟁같은 런치타임이 지나고 나면 옆에 냉동 감자포대가 엄청나게 쌓여요. 냉동감자에 코팅된 기름에 절여진 종이가 사람 피부의 유분기 같기도 하고, 땡볕에서 땀 흘려 일한 노동자의 피부 같기도 하죠. 주방에서 뜨거운 기름 옆에서 일한 사람들의 살갗같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노동력이란 주제를 표현하기에도 적합했죠. 초합리적인 가격의 제품들과 이를 떠받치는 값싼 노동력을 상징하는 재료라고 생각했어요.”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능수능란한 관종’ 전시장 입구에 전시된 대형 조각 ‘미진 유진’. 신민 작가 제공

지난 2일 쾨닉 서울에서 만난 신민은 그가 만든 조각과 똑 닮아있었다.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작품들은 고용주가 싫어하는 ‘자아가 비대한 노동자’들이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미진 유진’은 높이가 3.6m에 달하는 대형 조각으로 사천왕처럼 전시장 입구를 지키며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장대한 기골, 성난 표정, 순응하지 않는 눈을 가진 이들은 현실의 ‘웃는 얼굴’ 뒤에 가려진 진짜 노동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일을 시작할 때 기업을 비판하거나, 고객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등 각종 서약서에 사인을 하게 돼요.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고, 고객의 요구에 응할 의무가 주어지죠. 코로나19 팬데믹 때 다들 마스크를 쓰고 일했잖아요. 눈은 웃고 있는데, 마스크 안에서는 입만 움직이며 욕을 하고 있었죠. 노동자들의 속마음을 표정으로 후련하게 드러내고 싶었어요.”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능수능란한 관종’ 전시장 입구에 전시된 대형 조각 ‘미진 유진’. 신민 작가 제공
웃는 표정에 가려진 ‘노동자의 진짜 얼굴’
머리를 감싸는 머리망···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현실 보여줘

여성 서비스직 노동자의 상징과도 같은 ‘머리망’은 그의 작품의 주요 테마다. “머리망은 유니폼의 일부예요. 다이소에 가면 머리망을 사이즈 별로 팔고 있을 정도예요. 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이 대부분 머리망을 하는 최저시급 서비스 노동부터 시작하거든요. 머리망이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부당한 현실, 착취,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오브제라고 생각했어요.”

신민은 최근 여러 미술관·갤러리 그룹전에 참여하며 주목받는 작가가 됐지만, 사실 ‘오래 된’ 작가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했지만 미대가 아닌 공대를 나왔다. 기계시스템디자인공학을 전공하며 미대 수업을 청강했다. 타과생 수강이 어려운 미대 수업에 문을 열어준 이는 미국에서 온 티모시 블럼 교수였다. “교수님이 ‘너는 예술을 해야 한다’ ‘소질이 있다’며 격려하고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어요. 덕분에 용기를 내 작품활동을 하고 전시장 문을 두드렸죠.” 전과를 생각하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전과가 어렵기도 했지만, 청강을 하다보니 예술이라는 게 어차피 혼자하는 작업이라는 걸 알게 됐다. 미대를 가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신민 ‘세미(世美) 시리즈 3’(2022), 혼합재료, 25.7cm×32.7cm. 쾨닉 서울 제공
신민 ‘세미(世美) 시리즈 10’(2022), 혼합재료, 25.7cm×32.7cm. 쾨닉 서울 제공

‘끌어준 이’가 없었지만 신민은 스스로 길을 개척했다. 2006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대안공간을 찾아 작품을 알리고, 전시를 열지 못하면 작품을 찍은 독립잡지 ‘월간 사진기’를 펴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전시장 삼아 자신의 작품을 올렸다. 꾸준히 올린 포스팅이 인기를 끌면서 전시 제안이 들어왔다.

“대부분 미술관이 평일 오후 6시면 문을 닫고, 월요일엔 휴무예요. 저 같은 서비스직 노동자는 월요일에 쉬는 사람이 많은데, 전시장에 가기 어렵죠. SNS를 전시장 삼아 작업과정을 올렸어요. 그랬더니 일면식도 없는 패스트푸드점, 커피숍에서 일하는 분들이 공감하는 메시지를 보내주셨어요. 전시장의 방명록 같이 SNS가 작품에 대해 관객과 소통할 창구가 된 거죠. 제게 SNS는 고된 노동으로 인해 초주검이 된 사람들과 이티(ET)처럼 손가락으로 교감하는 광장과 같아요.”

2022년 북서울미술관 ‘초각충동’에 전시된 신민의 ‘우리의 기도-나는 동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껴안는다, 나는 연대한다’. 신민 작가 제공
서로 미워하기도 하지만, 힘든 업무환경 때문에···
동료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길 기도하는 ‘연대의 마음’

함께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과의 연대 또한 신민에겐 중요한 주제다. 2022년 북서울미술관 ‘조각충동’에서는 머리망을 한 여성 노동자들의 거대한 흉상 여러 점을 군상처럼 배치했다. 제목은 ‘우리의 기도-나는 동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껴안는다 나는 연대한다’.

“업무환경이 너무 고되고 부당해서, 서로를 감시하고 미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쉽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동료는 밉지만, 왜 그런지 생각해보면 일이 힘들어서거든요. 동료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동료를 사랑한다는 말을 속으로 기도하며 작품을 만들었어요. 평소엔 어깨만 부딪혀도 싫어하지만, 누가 생리대가 필요하다고 하면 기꺼이 내어줘요. 작은 지점에서 시작하는 자매애와 연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기도’. 신민에게 ‘기도’는 작업 과정의 일부이자, 작품을 만드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는 작품을 만들면서 종이에 소원을 적어 붙이고 또 그 위에 종이를 바르는 과정을 반복한다. 소원의 내용은 친구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부터,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는 내용까지 다양하다. 북서울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소원을 말해봐’에 전시된 대형 조각인 ‘미래’는 그런 제작과정을 관람객과 함께하는 작품이다. 작품 위에 관람객들이 소원을 적은 종이를 붙여 작품 전체를 뒤덮으면, 그 위에 다시 종이를 바르고 새로운 얼굴을 그려넣었다. 관람객의 호응이 좋아 ‘미래’는 벌써 네 번째 얼굴을 바꿨다.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원을 말해봐’에 전시된 ‘미래’. 신민 작가 제공
지난달 16일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드래그 아티스트 ‘모어’ 모지민(오른쪽)과 신민 작가가 함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신민 작가 제공

신민은 퍼포먼스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부산현대미술관 ‘능수능란한 관종’에서 드래그 아티스트 ‘모어’ 모지민과 함께 퍼포먼스 ‘일할 땐 핸드폰 할 시간이 없어서 틱톡 릴스를 찍을 수 없잖니. 그렇다면 CCTV야 우리들의 춤을 봐!’를 선보였다. 초록색 앞치마를 하고 머리망을 한 신민과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모어가 함께 화려한 춤사위를 선보인다. 노동자를 감시하기 위한 CCTV의 의미를 전복해, 해방과 표현의 도구로 활용하는 퍼포먼스였다.

“삶에서 CCTV 같이 자신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존재들을 떠올리며, 오히려 그 앞에서 춤을 추고 자신을 뽐내는 걸 같이 해보고 싶었어요. 혼자 조각하는 것보다 100배는 재미있었어요.”

신민은 예술가이자 노동자, 여성, 연대자, 기도하는 사람이다. 신민은 현재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다. 지난해 1월부터 오는 11월까지 춘천문화재단 레지던시에 입주해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앞으로 여성 노동에 대한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며, 내년엔 P21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그에게는 상업갤러리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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