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하는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2024. 7. 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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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뷔야르, '빌뇌브 쉬르 욘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898년,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 프랑스 알비

음식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원초적 욕구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종종 우리는 훌륭한 요리나 멋진 플레이팅이 서비스되는 레스토랑에서 예술적 감동을 느낀다. 요리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탁월한 예술가이자 독창적인 요리사였던 19세기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를 보면, 요리와 예술은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는 듯하다. 둘 다 창의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위 그림은 프랑스 화가 장 에두아르 뷔야르(Jean-Edouard Vuillard)가 요리하는 로트레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뷔야르는 모리스 드니, 피에르 보나르, 폴 세뤼지에 등 파리의 젊은 화가들과 함께 나비파(Les Nabis) 활동을 했다. 'Nabi'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것으로, 그들의 예술이 종교적 선지자의 역할을 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학적 측면에서는 빛의 변화에 따른 인상 그대로를 묘사하는 인상파에 반발해 작가의 주관적인 형태나 색채를 표현하려고 했다. 가끔 뷔야르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그를 위해 모델이 되어준 예술가 친구들의 사적이고 친밀한 모습을 그렸다.

로트레크는 뛰어난 미식가였다. 술만큼이나 맛있는 음식들을 즐겼으며, 손수 요리하는 것도 정말 좋아했다. 평소 자신의 레시피를 적은 책까지 출판하고 싶어 했다. 사망 후엔, 그가 쓴 요리책이 친구이자 미술상인 모리스 주아이앙에 의해 '요리법(L'Art de la Cuisine)'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로트레크는 요리를 자신의 예술 활동의 연장선으로 여겼다. 요리와 예술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친구와 지인들을 위해 유쾌하고 시끌벅적한 즉흥 만찬회를 자주 열었고, 주방에서 직접 독창적인 요리를 시연했다. 친구들은 때때로 로트레크에게 요리를 부탁하곤 했다. 이들의 모임은 잔치 퍼포먼스나 이벤트 같은 것이었다. 한번은 길고 흰 앞치마를 두른 로트레크가 냄비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랍스터 요리를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요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많은 희귀한 요리법을 알고 있었다. 친구 중 한 명인 상징주의 시인 폴 르클레르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는 먹은 것만큼이나 많이 요리했다. 7시간 동안 양고기 다리를 요리하거나 랍스터 아메리카인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친구들끼리 어울리는 요리 이벤트에 참석한 뷔야르가 오븐 앞에 서 있는 로트레크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음식에 조예가 깊었던 로트레크는 음식과 음료를 주제로 한 카바레 포스터도 많이 그렸다.

로트레크는 부유한 귀족 출신이었다. 로트레크의 요리는 그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준다. 로트레크의 조리법과 메뉴는 보통 사람들의 식생활과 다른 측면이 있었다. 그의 요리책에 있는 레시피 중에는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인 것이 많다. 꽤 흥미롭긴 하지만, 값비싼 식재료라든지 긴 조리 시간 같은 여건들 때문에 지금 우리가 따라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의 레시피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마멋(marmot; 다람쥣과의 설치 동물) 스튜를 위한 요리법을 보자. "9월의 어느 해가 뜰 무렵 햇볕을 쬐고 있는 마멋 몇 마리를 잡아 죽인 후, 가죽을 벗기고 지방 덩어리를 조심스럽게 따로 떼어내라… 마멋 고기를 잘라 독특한 야생의 풍미를 가진 토끼 스튜처럼 요리하라." 아마도 그의 가장 재미있고 유명한 요리는 캥거루구이일 것이다. 그는 당시 파리 서커스단의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던 인간 대 캥거루의 권투 경기를 본 후, 커다란 양고기에 파우치 모양을 만들어 붙여 캥거루처럼 보이는 요리를 만들기도 했다. 또, '지진(Tremblement de Terre)'이라고 이름을 붙인 칵테일을 발명했는데, 이는 압생트와 코냑을 3:3 비율로 섞어 와인 잔에 얼음 조각과 함께 마시는 음료였다.

로트레크는 유전적 질환으로 인해 10대 때 대퇴골이 골절되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다. 부모가 사촌 간이었는데, 그의 장애는 이런 누적된 근친혼의 가족력에 기인했다. 그의 신장은 1m 52㎝에서 성장을 멈췄고, 평생 어린아이 키로 살아야 했다. 눈에 띄는 작은 키로 늘 조롱을 받았는데, 그것이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른다. 로트레크는 녹색 요정이라고 불리는 독주 압생트를 지나치게 즐겨 마셨고, 성매매업소에서 매춘부들과 어울리며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결국 몽마르트르의 카페, 바, 댄스홀과 같은 밤의 세계에서 쾌락주의적인 삶을 살다가, 겨우 36세에 알코올 중독과 매독으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사망했다.

또래 남성들이 즐기는 대부분의 신체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던 로트레크는 예술에 몰두했고, 엄청난 양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1,000개 이상의 유화와 수채화, 363점의 광고 포스터, 5,000점 이상의 드로잉, 다수의 도예품과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남겼다.

한편, 로트레크에게 요리는 즐거운 축제이자 흥미진진한 모험이었으며 예술이었다.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의 큐레이터 카렌 세레스는 실험적인 도전 정신이 로트레크의 예술과 요리의 연결고리라고 말한다. 그는 전통적인 유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매체를 넘나들었다. 로트레크는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요리에서도 창의성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사회의 권위에 대해 보헤미안적, 전복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로트레크의 삶은 짧았지만, 그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인생을 참 멋지게 즐기며 살다 간 사람이었다.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판화가, 그리고 요리사. 그리고 그것들을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전통과 관습을 뒤집어엎는 창의적인 정신과 태도였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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