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아의 도시스카프] 사람이 차별하는 공간, 사람에게 답이 있다

2024. 7. 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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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라이프스케이프 크리에이터

성공한 도시계획 이면에 공간 따른 차별 존재 공원 아닌, 공원 앞 카페에만 모여드는 시민들 '도시 관계 언어' 디자인, 공간 활력 만들어내 '사람냄새' 나는 인간적 도시 설계 위해서 필요

그늘을 찾아다니는 계절이 되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는 시골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여럿이 앉을 수 있는 평상 대신 벤치와 테이블, 카페가 들어서 있다. 광장이나 공원은 텅 비어있고, 바로 앞 카페는 만석이다. 동네 어른들은 "밖에 나가면 다 돈이야. 물 한 모금 마실 곳이 없어"라고 말씀하신다. 화려하고 근사한 광장이나 공원이 '그들만의 공간'이 되고 만 것이다.

얼마 전 서울과 부산이 아시아에서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었다. 우리나라 도시 디자인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소도시에도 세계적인 건축 거장들이 디자인한 공공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디자인 경쟁력이 생기고 관광객도 늘어나니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도시에도 명암은 존재한다.

공간은 사람을 차별한다. 카페나 상점은 경제적 여건에 따라 사용자를 구분한다. 공공 공간은 출입을 제한하지는 않지만, 사용에 제약을 준다. 공원에 분명히 쉼터는 있는데, 쉴만하지가 않다.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것은 생각조차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원이 아닌, 공원 앞 카페에 모여든다.

지자체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관광 상품으로 각종 골목길이나 홍보관을 조성하고, 주변에 공원을 만들고 나면, 나머지 편의 기능은 인근 카페들이 알아서 도맡는다. 쉴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서, 잠시 업무를 볼 공간이 필요해서, 때로는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도 간다. 그러고 보면, 상업 공간인 카페가 참 큰일을 하는 셈이다. 문제는 공공 공간이다. 단순히 깨끗한 화장실과 앉을 수 있는 의자, 취식 장소를 제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발을 내딛는 첫 순간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일관되고 만족스러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공원이라면 첫째, 충분히 아름다운 경관과 쉴만한 곳이 있어야 하고, 둘째, 지역 커뮤니티와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셋째, 무엇보다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고유성, 그리고 장소성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공원을 가나 기승전 '카페'다. 오픈 에어링을 위해 일부러 노천카페에도 가는데, 그렇게 좋은 공원에 가서도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매력적이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까닭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산업이 먼저 발달한 미국은 인구 100만 명당 카페가 약 200여 개 정도 된다. 서울은 1400여 개나 된다. 한옥 카페, 펫 카페, 정원 카페 등 종류도 다양해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더없이 독특하고 이색적인 광경이다.

문제는 돈이다. 경제력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커피를 사랑하는 민족이라지만, 단순히 커피만을 위해 카페에 가겠는가. 적은 비용으로 세련된 공간에서 개인적 욕구와 더불어 사회문화적 욕구까지 충족시킬 수 있으니 '참새가 방앗간 들락거리듯' 모여드는 것이다. 이마저도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 만국 공통어는 바디 랭귀지다. 언어를 몰라도 몸짓, 발짓, 손짓으로 어느 정도의 소통이 가능하다. 그보다 더 강력한 언어는 디자인이다. 직관적인 경험과 판단으로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관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현란한 수식어도,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도 필요하지 않다.

훌륭한 디자인에 대한 가치 판단은 고객인 사용자의 몫이다. 허름한 동네 슈퍼 앞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도심 공원에 있는 거대한 파라솔과 값비싼 벤치보다 때론 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경험을 주기도 한다. 조촐한 쉼과 적당한 사람 냄새, 그리고 복제되지 않은 지역의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 있어 디자인은 관계의 언어다. 소통을 통해 보다 더 살만한 공간과 도시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세종대왕은 글을 그림의 떡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던 문자를, 개 돼지 취급을 받던 백성이 불가촉의 영역인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깊은 마음은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문자 한글을 만들었다. 서민과 여성들이 문학 활동에 참여했고, 사회적 소통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모든 것은 시작은 백성, 즉 사람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었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벤치와 땡볕 속에 버려진 듯 갖다 놓은 의자들을 심심찮게 본다. 관리사무소 직원들조차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벤치들을 시민들이 사용할 리 만무하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온다'라는 스칸디나비아 속담이 있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활동에 영감을 받는다. 생동감 있고 문화적 활력이 넘치는 공간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러한 공간을 위해서는 관계의 언어, 즉 디자인이 필요하다.

코펜하겐의 슈퍼킬렌 공원은 약 750미터의 길고 좁은 공원을 주민과 함께 쉼이 있는 문화적 허브로 만들어 2013년에 레드닷 어워드에서 베스트오브 베스트를 수상하기도 했다. 파리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 중 하나인 뤽상부르 공원에는 이동할 수 있는 4500여 개의 의자가 있다. 원하는 대로 필요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공연장 객석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문화 공간이 되어 주고, 누군가에게는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화기애애한 사교의 장이 되어 준다. 의자 하나가 만들어 주는 복합적인 감성과 경험이다.

"도시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람들의 희망, 열망, 그리고 자부심을 읽는 것과도 같다." 휴 뉴얼 제이콥슨(Hugh Newell Jacobsen)의 말을 되뇌어 볼 필요가 있다. 살기 좋은 도시의 진정한 경쟁력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과 도시민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배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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