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26개월 카르텔 전쟁이 남긴 것

이영태 2024. 7. 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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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실패에 낯 두껍게 “환골탈태” 
통신∙은행∙사교육도 빈손, 또 빈손 
남은 3년 쌓일 실패와 고통 무섭다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박상욱 대통령비서실 과학기술수석비서관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2025년도 R&D 재원 배분 결과 관련' 브리핑을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얼마 전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의 브리핑을 보며 들었던 생각. 낯이 두꺼워도 한참 두껍구나,였다.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 배분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는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했다. “복원이나 회복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환골탈태한 수준입니다.” “내년도 R&D 예산은 역대 최대 규모입니다. 재정 여력이 정말 없는데도 큰 폭으로 증액한 겁니다.”

시계를 1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두 달 뒤 주요 R&D 예산은 전년보다 13.9% 깎였다. 당시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낡은 R&D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선도형 R&D로 나아가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결과는 다 아는 바다. 과학계 여기저기서 비명이 쏟아졌고, 카르텔의 실체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내년 예산은 올해보다 13.2% 늘었지만, 삭감 전인 작년과 비교하면 달랑 0.4%(1,000억 원) 늘었다. 이를 두고 역대 최대라고, 큰 폭 증액이라고, 또 환골탈태라고 말할 수 있다니 그 희한한 셈법이 놀랍다. 무엇보다 올해 삭감된 예산 탓에 과학기술계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추가경정예산이라도 편성해 당장 지원을 늘려줄 생각은 않고 6개월 뒤에야 늘려주면서 온갖 생색이다.

상식적인 정부라면 브리핑은 이랬어야 한다. “잘못된 판단으로 피해를 드려 정말 송구합니다. 미흡할 수 있겠지만 내년부터는 원상 복구하겠습니다. 현재도 고통을 받는 분들을 위해 당장 지원책이 없을지도 찾아보겠습니다.”

실패한 카르텔 타파가 어디 R&D뿐인가. 3대 통신사 독점 카르텔을 깨부숴 통신비를 인하하겠다며 추진한 제4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은 끝내 무산됐다. 사업자 확보에만 급급해 재무건전성조차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부적격 사업자에게 떠넘긴 결과다. 5대 시중은행의 짬짜미 이자장사에 균열을 내겠다고 했지만 지방은행 1곳(대구은행)을 시중은행으로 전환하는 데 그쳤다. 대구은행이 은행권 과점을 깨뜨리는 메기가 될 거라고 믿는 이를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사교육 카르텔은 시대인재라는 대어(大魚)를 낚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지 않았느냐고 득의양양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지난해 사교육비 총액은 전년보다 5% 가까이 불어난 역대 최대였다. 카르텔이 사교육 문제의 본질은 아닐 거란 얘기다.

검찰 특수통 출신 이인규 변호사의 회고록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에는 2003년 대선자금 수사 상황이 ‘자랑스럽게’ 담겨 있다. 우연히 실마리가 포착된 SK에서 삼성, 현대차 등 다른 그룹으로 수사를 확대하면서 아무런 단서도 없이 “협조 안 하면 기업도 오너도 다친다”는 협박으로 자백을 이끌어냈다는 무용담이다. ‘반(反)카르텔 정부’로 성격을 규정하고 근거도 없이 일단 카르텔 전쟁을 선포하고 보는 건 이런 특수통 검사의 기질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 본다.

수사도 문제지만 정치는 더더욱 달라야 한다. 정치는 협박이 아니라 포용과 소통의 과정이다. 카르텔을 도려내더라도 조용하고 정교해야 한다. 타파 대상으로 지목한 집단에게 어떻게 필요할 때 손을 잡아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멈출 징후는 찾을 수 없다. 그러니 실패를 자인할 리 없다. 하긴 3년 차인 올해 신년사에서도 “이권과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을 반드시 타파하겠다”고 전선을 더 넓힌 마당이다. 남은 34개월 실패와 고통이 얼마나 더 쌓일지 무섭다.

이영태 논설위원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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