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단톡방 성희롱 가해자일 때

이슬기 전 서울신문 기자 2024. 7. 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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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미다시]

[미디어오늘 이슬기 전 서울신문 기자]

▲이미지=안혜나 기자.

분노가 들끓는 한 주 였다. 지난달 27일 미디어오늘 단독 보도로 '기자 단톡방 성희롱'이 불거진 여파였다. 보도에 따르면 국회대통령실 등을 출입하는 정치부 남성 기자 3명이 타사 기자와 여성 정치인 등 최소 8명 이상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했다. 여성기자 풋살대회 참가자들의 경기 모습도 이들 성희롱의 대상이 됐다.

풋살대회에 참가했던 여성 기자 A는 “찝찝하다”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앞으로 아무 생각 없이 운동을 즐기면서 할 수 있겠느냐”며 가슴이 커지면서 남자 애들 시선에 절로 위축되던 초등학교 체육 시간이 떠오른다고도 했다. 가해 기자가 가까운 이여서 받은 충격도 있다. 또 다른 여성 기자 B는 “처음 기사를 보고 느낀 감정은 나와 친한 동료의 발언 수위가 세지 않아 다행이라는 것”이라며 “그간 여성혐오를 강력히 비판해온 내가, 성폭력 가해자인 지인을 감싸는 많은 2차 가해자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게 돼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고백했다. 더불어 많은 기자들이 2017년 기자 성희롱 단톡방 사건, 2019년 언론인들이 다수 참여한 불법 촬영물 공유 오픈 채팅방 사건을 겪고도 같은 일이 재발하는 것에 무력감을 느꼈다.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지난달 28일 발표한 성명에서 짚었듯 '명백한 인권침해이자 기자 윤리 위반, 여성 기자를 동료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행위'가 이번 사건을 설명하는 'A to Z'다. 뿐만 아니라 최근 판례상 '단톡방 성희롱'은 공연성이 인정돼 모욕죄가 성립 가능한 범법 행위이기도 하다. 형법 상 모욕죄의 형량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다.

여기에 더해, 기자의 단톡방 성희롱이 더욱 문제적인 이유가 있다. 기자라는 직업군이 갖는 독특한 위치성 때문이다. 기자는 제한된 정보와 사람에 대한 접근권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사라는, 자신의 생각을 풀어낼 플랫폼을 가졌다. 윤보라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은 논문 '디지털 거주지(digital dwelling)와 성폭력'에서 남성 가수와 기자, 대형마트 디지털 수리 기사 등이 연루된 단톡방 성희롱 사건을 언급하며 “이들은 각각 성적 접촉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고, 직업 특성상 제한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하며 (중략) 제도로서 성폭력을 실행할 수 있는 많은 자원을 쥐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성폭력을 실행할 수 있는 많은 자원을 가진 직업'이 기자라는 직업이 갖는 무게다. 여성 국회의원이 성희롱 대상에 오른 것처럼 기자는 직업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자사 동료들 외에 타사 기자들과도 출입처의 기자단 또는 '꾸미'(취재원을 함께 만나기 위한 모임)로 만나 교류가 많다. 무차별적으로 혐오를 일삼는(단톡방 성희롱 피해자 가운데는 남성 기자도 있었다) 기자의 존재가 무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들이 혐오 정서가 투영된 기사를 쓸 가능성으로 인한 피해는 오롯이 독자들이, 취재 현장에서 노동권과 성적 자기결정권이 위협받을 우려는 오롯이 동료들과 취재원의 몫이다.

▲ 단체카톡방, 카톡방. 사진=gettyimagesbank

게다가 여성기자 풋살대회를 두고 벌인 성희롱은 명백한 여성혐오이자 백래시(반동)다. 오랫동안 언론계에서 축구는 공식적으로는 남성 기자들만이 누린 스포츠였다. 한국기자협회는 1972년부터 기자 축구대회를 열어왔지만, 대회는 남성 중심이었고 여성 기자들은 주로 응원에 동원됐다. 그러다 지난해 처음 여성기자 풋살대회가 개최됐다. 여성 기자들에 모처럼 활력을 불어넣는 사건이었고, 29개팀 340명의 기자들이 함께 뛰며 풋살의 즐거움을 알아갔다. “필드에서 최선을 다해 땀 흘려 뛰는 동안 응원하리라 믿었던 동료 기자가 이런 저열한 생각을 갖고, 표현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이라는 풋살 대회 참가 기자들의 성명은 기자 사회에 여전한 여성혐오와 백래시에 대한 응분의 발로다.

'오랫동안 한국의 언론, 특히 (남성) 언론인은 한국 사회 강간 문화의 방조자 또는 공범자였다.' 2019년 오픈 채팅방 사건이 터졌을 당시 열린 토론회에서 기조 발제를 맡은 최이숙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가 한 말이다. 취재원으로부터 성접대를 받아온 유구한 역사, 성범죄 피해자에 공격적인 2차 가해성 기사의 작성, 일련의 단톡방 사건 등을 생각하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번 사건에는 풋살대회 참가 여성 기자들의 요구처럼 각 언론사의 강력한 징계와 함께 가해자들의 공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 이어 언론계 전반이 머리를 맞대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놔야 한다. 각 언론사에서는 기자 채용 과정에서도 성인지 감수성을 척도로 하는 검증 기준을 세워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로서는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하는 수습 과정에만 치우친 젠더 보도와 취재 윤리 교육을 언론사 차원에서도 주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한국기자협회도 이 과정을 적극 지원하고 개입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기자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처음 불거진 게 2017년이다. 당시 해당 기자들은 기자협회로부터 1년 6개월~2년의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이는 기자상 수상 제외 외에 별 실효성이 없었다. 7년 만에 유사한 일이 다시 벌어진 데는 협회의 책임도 있다. 그간 기자협회는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 결과를 보여야 한다. 그것이 언론이 '강간 문화의 방조자 또는 공범자'라는 오명을 벗는 일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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