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작 전시 논란 ‘라크마’의 굴욕은 서귀포의 이중섭 아이 그림에서 시작됐다

노형석 기자 2024. 7. 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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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소장품인 이중섭 작 ‘장대놀이하는 아이들’(1956). 2017년 3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두 아이와 비둘기’란 제목으로 낙찰됐던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검색할 수 있는 이중섭 전작 도록(카탈로그 레조네)에는 ‘장대놀이하는 아이들’이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지난달 26일 미국 라크마뮤지엄 ‘한국의 보물’ 전시장에서 열린 한국전문가 감정평가회의에서 태현선 리움미술관 큐레이터는 이 작품이 이중섭 작으로 명기돼 진위논란에 휩싸인 라크마 전시 출품작 ‘기어오르는 아이들’의 원본이라고 밝혔다. 그는 서명이 없는 타일그림인 ‘기어오르는 아이들’이 원작 ‘두 아이..’를 본떠 만든 복제 상품이라고 짚었다. 서울옥션 제공

“여기 미술관에 이중섭 작품으로 전시된 타일 그림 ‘기어오르는 아이들’은 이중섭이 만들지 않았어요. 명백히 복제한 상품입니다. 이 복제그림이 본뜬 이중섭의 진짜 원작 그림이 있습니다. 보여드리지요.”

장내가 술렁거렸다. 충격적인 사실을 밝힌 태현선 삼성미술관 리움 큐레이터는 곧장 전시실 스크린에 이중섭이 1956년 그린 원작 한 점의 이미지를 투영해 보여주었다. ‘장대놀이하는 아이들’이란 제목을 단 작품이었다. 대나무 낚싯대를 화폭 중앙에 걸친 구도가 특이했다. 한손엔 비둘기를 안고 다른 한손엔 낚싯대와 낚싯줄을 쥔 위쪽의 아이, 두 손으로 낚싯대를 부여잡은 아래쪽 다른 아이가 노는 정경을 담고 있다. 가난했던 이중섭은 종이 위에 연필과 크레파스, 질 낮은 유채 물감을 섞어서 형과 색을 구사했다. 인생을 초탈한 구도자의 표정을 지은 아이들 유희장면을 단순하지만 집중적인 묘사력이 돋보이는 필치로 그린 뒤 왼쪽 위에 ‘중섭’ 서명을 써넣었다.

청중은 직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크린의 원작 이미지와 비교해 본 전시장의 타일 그림은 차이가 컸다. 원작과 구도, 인물 모두 닮았지만, 명백히 수준 떨어지는 모방작이 확실했다. 세부 잔 선이 사라지고 인물 형상의 묘사도 단순 치졸한 느낌이 도드라졌고 배경 색감도 달랐고 서명조차 없었다. 태현선 큐레이터는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의 카탈로그 레조네(전작도록)를 검색한 결과 미술관 출품작의 원본을 찾아냈다”면서 “전시 출품작은 명백히 원작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인 기획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라크마의 ‘한국의 보물’ 전에 이중섭의 50년대 작품으로 명기된 타일 그림 ‘기어오르는 아이들’. 26일 열린 한국 전문가 감정평가회의에서 태현선 리움미술관 큐레이터는 이 작품이 이중섭 원작을 본뜬 복제본 상품이라는 것을 원본을 제시하면서 입증했다.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2022년 사전 감정을 할 당시에 찍은 사진이다. 라크마 전시장에서는 이 작품을 가로축 중심의 수평구도로 틀면서 내걸어 구도가 어색해졌다. 윤범모 제공

지난 26일 오후 미국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카운티뮤지엄(라크마)의 기획전 ‘한국의 보물’ 전시장에서 열린 한국 미술전문가 4인 초청 감정평가 토론회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이 토론회는 지난 2월25일부터 6월30일까지 라크마에서 열린 원로 재미동포 체스터 장의 기증 컬렉션 전시회에 출품된 이중섭·박수근 작가의 작품을 둘러싼 진위 논란이 번지자 꾸려졌다.

전시 직후부터 위작 논란이 현지 컬렉터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었고 지난 4월 한국화랑협회와 박수근감정연구소 등 국내 감정 전문가와 감정기관들이 위작 의혹을 제기하며 전시 및 진품검증 경위를 요구하는 질의서를 보낸데(한겨레 4월5일치 18면) 이어 최근에는 각 미술관 아시아미술 담당 큐레이터들까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자 급히 마련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미술사가인 홍선표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예사 연구자인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 태현선 큐레이터, 김선희 전 부산시립미술관장은 라크마 쪽의 특별 초청을 받아 문제의 전시 출품작들을 살펴본 뒤 전시를 만든 아시아부장 스티븐 리틀과 다른 미술관 큐레이터, 보존과학 관계자들과 종일 발표 토론하며 출품작 진위에 대한 공방을 벌였다.

원래 이날 회의는 문제의 전시를 기획한 라크마 아시아부장 스티븐 리틀의 발표 내용이 중심이었다. 자기가 재미교포 체스터 장의 집을 3년간 수시로 출입하면서 고른 기증작 100점 가운데 30여점의 종이 재질이나 물감 재료들이 1950~1960년대 미국 공장에서 제작한 것들이고 도상적으로도 작가들의 것임이 입증된다는 식의 해명성 발표로 오전 시간을 모두 채웠기 때문이다.

자칫 그의 변명만 추인해 주는 들러리 행사로 끝날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점심 뒤 태현선 큐레이터와 홍선표 이대 명예교수 등이 원화 등의 명확한 자료들과 함께 출품작이 진품이 아니라는 감정 근거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고 리틀은 궁지에 몰렸다고 한다. 특히 태 큐레이터가 현재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 소장된 이중섭의 원화 ‘장대놀이하는 아이들’ 도판을 보여주면서 라크마 출품작 ‘기어오르는 아이들’이 복제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한 게 논의의 향방을 가늠하는 결정타가 됐다.

뒤이어 홍선표 교수는 이중섭, 박수근 작품의 서명 필치와 작성 위치의 맹점을 짚으면서 진작이 아니라는 것을 명쾌하게 논증했다. 홍 교수와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화원 이인문과 김명국의 작품으로 표기된 그림들과 민화 문자도 등을 특정하면서 고미술 영역도 진본 아닌 위작과 수준 이하 작품들이 수두룩하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결국 마이클 고반 관장이 나서 도록을 발간하지 않겠다며 문제점을 시인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급변한 것이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스티븐 리틀 부장은 한국 일부 감정 전문가의 위작 소견을 신뢰할 수 없으며 계속 근거자료를 제시하겠다고 강변했으나 그를 제외한 라크마 관계자들은 한국 전문가들의 지적들을 전적으로 경청했다”며 “이날 회의는 라크마 쪽이 사실상 전시의 오류를 전면적으로 인정하면서 공동연구를 지속하자고 제안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고 전했다.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의 원화 그림에서 비롯된 반전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지난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뮤지엄(라크마)의 ‘한국의 보물전’ 전시장에서 한국 미술계 전문가 4명을 초청해 전시 작품을 살펴보게 한 뒤 열린 감정평가 회의(Study Day)의 모습. 마지막 순서에서 김선희 전 부산시립미술관장이 발언하고 있다. 청중석 맨 뒷줄 오른쪽에 앉은 인물이 마이클 고반 관장이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 제공

서구미술관에서 한국 전문가를 불러 작품 감정 평가회의를 연 것은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그동안 미국 내 백인 기획자 연구자들에 의해 일방적 시각으로 재단됐던 미국 내 아시아 미술 전시의 현실로 보면 고무적인 사건이란 평가다. 실제로 라크마가 뒤늦게 한국전문가를 초청해 감정을 맡긴 데는 한겨레 등에서 보도한 전시 위작 논란이 미국 현지 아시아미술 담당 큐레이터들에게 알려지면서 미국 미술관과 큐레이터 내부의 여론이 급속히 악화한 게 주된 요인이 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도록 발간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국내 미술계에서는 여전히 개운치 않은 앙금이 남는다는 반응들이 적지않다. 저작권자인 박수근 유족의 경우 진품 입증 때까지 선친의 작품으로 명기된 작품을 내리라고 지난 4월 질의서를 보내면서 요구했는데 라크마 쪽이 정면 묵살하고 작품 전시를 강행한 건 상식과 예의를 벗어난 행태로 사과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미술사학계 한 전문가는 “위작 혹은 저급한 수준의 작품으로 미국 현지의 한국미술 인식에 악영향을 준 전시인데 거의 끝난 시점에 국내 전문가 평가회의를 연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술관 쪽은 전시를 앞두고 국내 감정전문가들의 사전 자문 절차도 검토했으나 한국의 미술품 감정을 이해관계자인 화랑업계 인사들이 주도한다는 점을 들어 결국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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