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과 유럽 회의주의자들의 본색[앙헬 알론소 아로바 - HIC]

2024. 7. 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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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해외 석학 기고글 플랫폼 '헤럴드 인사이트 컬렉션'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6월 6~9일, 유럽연합(EU) 시민들은 새 유럽의회 선출을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다. 인도 선거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이번 선거는 세계 인구의 약 절반이 투표를 한다는 의미에서 많은 이들이 ‘슈퍼 선거의 해’로 일컬은 2024년에 지구상 두 번째로 큰 민주주의 절차였다.

다가올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올해 눈여겨볼 가장 중요한 선거임은 분명하지만, 이번 유럽의 결과와 전 세계의 연관성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렇다. 시민들이 유럽연합의 주요 기관에 해당하는 유럽 의회의 차기 구성원, 즉 7월 16일 임기를 시작할 720명의 의원(MEP)을 선출한 것뿐이다. 그러나 이 선거에 따르는 권력 균형과 지형의 영향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것으로 기타 EU 기관, 특히 다음 집행위원회(EU의 행정 조직)의 지도부가 정해질 것이다. 좀 더 간접적으로는 EU 이사회(회원국 지도자들이 모이는 EU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에도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간단히 세 개의 헤드라인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애초 우려와 달리, 친EU(Pro-European) 정당들이 수성하면서 과반수 유지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도 유럽의 각 기관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힘은 약해졌지만, 전통적인 세 개의 주요 정치 세력인 보수, 사회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정당이 약 400석을 확보했다. 각종 투표 때는 54석을 차지한 녹색당이 아마도 이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친EU 정당들은 이 의석수로 충분히 EU의 키를 5년 더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확실한 과반을 확보하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고,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유럽 의회는 더 많은 전투를 일상적으로 치러야 할 수도 있다.

두 번째 헤드라인은 극우 진영이 크게 선전하며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극우의 우세는 많은 이들의 걱정과 달리 파도가 아닌 조수에 가깝다. 그런데 밀물이 밀려드는 속도가 빠르다. 두 개의 주요 극우 정치집단인 유럽 보수와 개혁(ECR) 그리고 정체성과 민주주의(ID)가 총 141석을 얻으면서, 극우의 영향력은 앞으로 몇 년간 그 어느 때보다 커질 것이다. 만일 그들이 연합했더라면, 지금 유럽의회에서 두 번째로 큰 세력이 됐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선출된 의원 중 10% 이상은 아직 어떤 정치 집단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이 중 상당수가 유럽회의주의자(Eurosceptic)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독일 에센시(市)의 한 시위 참여자가 지난달 28일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행사장 앞에서 “AfD를 위한 무대는 없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AP]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극우의 진군은 EU의 전통적 양대 엔진인 프랑스와 독일에서 특히 맹렬했다. 프랑스에서는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RN)이 압도적인 표차로 1위에 올랐으며, 독일에서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위를 차지했다. 유럽의 구조상 전통적 모터라 할 수 있는 프랑스-독일 축이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EU 창립 회원국 6곳 모두에서 이미 극우 정당이 첫 번째, 혹은 두 번째로 큰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개구리 실험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개구리가 들어있는 물은 갑자기 끓어오르지 않는다. 끓기 전까지 온도가 천천히 올라간다. 위험의 크기를 알지 못한 채 개구리는 조만간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번 선거 직후 몇 시간과 관련된 세 번째 헤드라인으로 이어진다. 바로 극우의 우세가 다수 유럽 회원국의 국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나라가 포함된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자신의 약해진 입지를 감안해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는가 하면, 벨기에 더크로 총리는 소속 정당의 선거 결과 부진에 사퇴했다. 국가 정부가 유럽 프로젝트를 동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국내 정치에 대한 함의가 상당할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 비춰보면, 유럽연합의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 생각해 볼거리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EU의 향후 전략적 지향점과 정책 방향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유럽 프로젝트 자체의 회복탄력성, 그리고 그 제도적 근간의 견고성과 관련이 있다.

EU 행정부 수반 격인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최근 두 번째 임기에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AFP]

정책의 경우,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뚜렷한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의석수 차이는 훨씬 줄고, 투표 내용에 따라 녹색당의 지원이 필요할 수도 있으나, 보수, 사회주의 및 자유주의자로 이뤄진 3인조가 과반수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상당한 연속성이 있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현 집행위원장의 연임도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어느 정도 조정은 있겠지만, 초점은 여전히 친환경·기술 전환, 그리고 산업기반의 자율성과 회복탄력성 강화에 맞춰질 것이다. 그러나 극우에서 오는 압박으로 정책적 구심점이 안보화(Securitization)의 확대로 점차 이동하면서, 어쩌면 사회적 측면이나 지역 간 연대의 강화 필요성에 대한 관심은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양쪽 이념 진영 간 입장차가 가장 뚜렷하면서 전통 정당에 대한 압박이 더 극심한 이민이 특히 민감한 영역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두 번째 시사점과 연결된다. 바로 제도 별 견고성과 가까운 미래에 다양한 유럽의 조직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다. 친EU 세력이 브뤼셀에서 지배력을 유지하겠지만, 유럽회의주의자들이 앞으로 몇 년 사이 다수의 유럽 수도에서 집권할 조짐이 보인다. 마린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나 기독교민주연합(CDU)이 집권을 위해 AfD에 의존하는 독일을 한번 상상해 보라. 이런 전망은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현실이다. 유로존의 4대 경제 대국이자 두 정통 정당이 잘 버티며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인 스페인에서조차, 집권을 위해 국민당이 반EU 극단주의 정당인 복스(Vox)와 손을 잡아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이미 지방·지역 차원에서는 적용된 공식이다).

만일 주요 지도자들이 유럽회의주의적 입장을 드러낸다면 유럽연합 이사회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각 수도를 차지한 정파와 다른 정파 소속의 관료가 EU 집행위와 의회를 이끈다면 어떤 잠재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지난 주기 때 이것의 ‘가벼운’ 버전을 겪었다. 오르반 빅토르 총리 같은 인물들이 의사 결정을 방해하고 정치를 지나치게 거래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헝가리 같은 중견국이 우크라이나의 가입 절차 개시처럼 중대한 순간에 EU를 마비의 위기로 내몰 수 있다면, 더 큰 국가들이 그와 같은 진영의 희생양이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각에서는 그런 위험성을 축소하면서 이탈리아의 사례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그들은 권력을 행사하면 극우 지도자들이 당초 가졌던 원심적 성향이 누그러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EU 이사회에서 유럽회의주의자의 수가 임계치에 도달하면 전통적으로 더 많고 더 나은 유럽에 반대하며 보다 국가주의적 대륙으로의 회귀를 바라는 이들이 곧 본색을 드러낼 수도 있다. 최근 열린 비공식 EU 이사회에서 이탈리아 멜로니 총리가 중요한 입장에 관한 결정을 지연시키던 모습은 그 예고편이었다.

그러니 다시 지정학으로 관심을 돌려서, 이 모든 것이 국제관계와 세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EU의 외교 정책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이미 2019년 EU 집행위가 더욱 지정학적인 입장으로 선회했을 때 발생했다. 그러나 강경파의 안보 이슈가 다른 문제들을 밀어내면서 국제정치에 대해 보다 확고한 입장과 훨씬 현실적인 태도가 만연해질 수도 있다. 친EU와 유럽회의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점차 복잡성과 변동성을 더해가는 국제적 시나리오와 맞물리면, 유럽은 더욱 내부의 딜레마에 몰두하면서 현시대가 요구하는 고무적인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의지가 꺾일 수도 있다. 만약 유럽이 미국이나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정학적 행위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지는 데 집착한다면 협력보다는 경쟁으로 더 치우칠 수도 있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의 시민 가운데 투표권을 가진 약 3억6000만명이 지난 6월 6~9일까지 유럽의회 선거에 투표했다. 유럽의회엔 선거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설치돼 있다.[EPA]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의 시민 가운데 투표권을 가진 약 3억6000만명이 지난 6월 6~9일까지 유럽의회 선거에 투표했다. 유럽의회엔 선거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설치돼 있다.[EPA]

물론 상당 부분은 유럽 너머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달렸다. 우선 불확실한 미국 선거가 있다.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 재입성에 성공하고 과거 80년 이상 세계 질서에서 궁극의 기둥 역할을 해온 대서양 동맹의 견고함이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와 가자 역시 유럽 외교 정책의 리트머스지가 될 것이다. 표면화되는 회원국 간 입장차가 벌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두 분쟁에 대해 이중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는 인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 밖의 세계, 특히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 대한 유럽의 입장에 뚜렷한 영향을 준다. 아시아 국가들과의 일관성 있고 건설적인 관계는 개별적, 지역적 차원 모두에서 매우 중요할 것이다. 이는 천편일률적 방식이 작동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존중과 상호 이해라는 입장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유럽이 다국적주의와 국가 간 연대로 대표되는 유럽의 최근 역사에서 보여준 영향력을 잃는다면 유감스러울 것이다. 유럽은 지금까지 통합과 상호의존성이라는 거버넌스 메커니즘을 모색해 온 다른 지역의 본보기였다. 유럽에는 역내의 회복탄력성을 찾을 권리가 있지만, 경쟁력과 경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신호는 이미 세계 속에서 EU의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유럽이 식민 지배의 과거와 갈등의 역사가 있음에도 국제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유럽을 감탄(사회 모델, 복지제도, 정치적 안정성)과 열망(유럽 프로젝트 그 자체)의 눈길로 바라봤다. 세계에는 다자주의의 확산과 향상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한 가지 핵심적 원동력은 더 많고, 더 나은 유럽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 미래가 찾아오길 희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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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인사이트 컬렉션(HIC·Herald Insight Collection)'은 헤럴드가 여러분에게 제공하는 ‘지혜의 보고(寶庫)’입니다. 제프리 삭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 배리 아이켄그린 미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교수 등 경제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 뿐 아니라, 양자역학·인공지능(AI), 지정학, 인구 절벽 문제, 환경, 동아시아 등의 주요 이슈에 대한 프리미엄 콘텐츠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칼럼 영어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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