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무너지는 이공계 인력 양성 체계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2024. 7. 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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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왼쪽 두번째)이 서울 관악구 서울대 삼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이공계 학생들과의 릴레이 대화'에 참석,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이공계 인력 수급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분석에 따르면 이공계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은 1999년 86만5668명에서 올해 81만413명으로 줄었고 2050년에는 반토막이 나서 42만7457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4년 후인 2028년에는 과학기술 분야의 신규 인력은 4만7100명이 부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10년 후에 1만 명의 의사가 부족해진다는 의료계보다 상황이 오히려 더 심각하다. 이공계 인력 양성과 관련해 단순히 저출산에 의한 인구감소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 나날이 심각해지는 해외 유출

애써 길러놓은 이공계 인력이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정부 출연연구원의 박사급 연구원 초봉이 300인 이상 대기업의 대졸 초봉의 7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공계 전문인력에게 연봉만큼이나 중요한 국가연구개발 예산도 믿을 수가 없다. 연구개발 예산이 4조6000억원(14.7%)이나 한꺼번에 삭감했다가 복원하는 상황에서는 안정적인 연구 수행이 도무지 불가능하다.

이공계 인력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버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추락이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 과학자는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나눠 먹고 갈라 먹는 '약탈적 이권 카르텔'로 전락해 버렸다.

오로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고 믿었던 과학자들이 한순간에 '떼도둑'으로 내몰려 버린 것이다. 의사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 증원과 변호사 증원의 차이도 구분하지 못하는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는 의사를 자신의 이익만 챙기겠다는 '악마'로 전락시켜 버렸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과학자의 사회적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출범한 문민정부는 출연연의 '가(歌)TO'와 같은 방만한 인력관리를 핑계로 출연연의 민영화를 시도했고 지금까지도 고질병으로 남아있는 PBS(연구과제중심제도)를 도입했다.

2005년에 불거진 황우석 사태도 과학기술계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제 과학기술은 국가의 성장동력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고(高)비용·저(低)효율'의 상징으로 각인되고 말았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과학기술계의 개혁'이 단골 메뉴로 등장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 국내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과학자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이공계 인력의 해외 유출이 30만 명을 훌쩍 넘어선 것이 그 결과다. 애써 길러놓은 석·박사급 이공계 인력이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뿐이 아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국가연구개발 예산이 큰 폭으로 출렁거린다.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에 익숙하지 않은 정부의 헛발질을 견디지 못한 젊은 과학자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공계 인재 유출은 젊은 과학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6년 국가석학(Star Faculty)으로 선정되었고 2014년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을 수상한 이기명 고등과학원 부원장도 정년퇴임과 함께 중국으로 떠난다.

8월 이후에는 베이징 예치후 응용수학연구원(BIMSA)에서 5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양자장론과 초끈이론 분야의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지난 6월 고등과학원 원장에서 물러난 최재경 전 원장의 사정도 안타깝다. 2019년부터 홍콩 중문대와 프랑스 낭시대에서 연구를 이어가야 했던 최 전 원장이 올여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미국과 중국의 적극적인 이공계 인력 확보 경쟁도 우리에게는 독약이다. 미국은 2030년까지 반도체 인력이 6만7000명이나 더 필요한 상황이다. 미국과 치열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도 2008년부터 해외 고급 인력 유치를 위한 '천인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은 과속 질주하는 천인계획의 심각한 부작용도 애써 외면한다. 실제로 유력한 노벨 화학상 후보로 꼽혔던 찰스 리버 하버드대학교 화학과 학과장이 작년 4월 가택연금 6개월과 5만 달러의 벌금형이 확정된 것도 중국의 천인계획 탓이었다. 2017년 천인계획의 외국인 전문가로 선정된 KAIST 교수도 자율주행차의 핵심 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혐의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었다. 

● 의대 쏠림에 무너지는 이공계 교육

1998년 IMF 외환위기로 촉발된 '이공계 기피'로 무너지기 시작한 이공계 대학이 좀처럼 활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공계 대학의 핵심인 물리학과와 화학과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융합학과'와 '계약학과'가 이공계 대학의 교육을 초토화하고 있다. 수도권 정원 규제로 꽁꽁 묶여있던 서울대에 '첨단융합학부'를 급조(急造)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학생들이 낯선 융합·계약학과를 반기는 것도 아니다. 최상위권 대학의 융합·계약학과의 정시 기준 미등록률이 50%에 이르기도 한다. 서울대의 첨단융합학부의 합격자 73명 중 12명이 최종 등록을 포기했다. 개별학과의 추가모집으로 어렵사리 정원을 채우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전망이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IMF 이후 이공계 학생들의 블랙홀로 변해버린 '의대'도 이공계 학과의 교육을 위협하고 있다. 의대 졸업 후 수련의 과정을 마치기만 하면 대기업 대졸 초봉의 3배가 넘는 연봉이 보장된다. 의사의 '고소득'과 함께 높은 '직업 안정성'도 의대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교육부의 알리미 공시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동안 의대 진학이 금지된 전국 7개 영재학교와 20개 과학고에서 학업을 중단한 학생이 모두 303명이나 된다.

KAIST를 비롯한 4대 과학기술원에서 2019년 이후 5년간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 버린 학생이 1006명에 이른다. 영재고·과학과·과학기술원에서 중도 이탈한 학생의 대부분은 의대로 진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 진학을 앞둔 입시생에게 의대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인 셈이다.

입학정원이 한꺼번에 1509명이나 늘어나는 내년부터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다. 이미 불안한 조짐이 확인되고 있다. 사교육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심지어 초등학교 5학년에게 의대 진학에 필요한 고등학교 2학년 수학을 가르치는 '초등의대반·선행반·초등메디컬반·초등M클래스'가 등장했다. 

39개월 동안 중학교 수학에서 고3 이과 수학까지의 교육과정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공교육 현장에서의 선행학습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는 '공교육정상화법'도 사교육 시장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지난 2월 정부가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이 무작정 밀어붙인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학부모의 얄팍한 주머니를 노리는 '사교육 카르텔'의 새로운 생명줄이 돼버린 현실은 황당한 것이다.

상위권 대학에서는 의대 입학을 위해 학업을 중단하는 재학생이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입시학원의 분석에 따르며 지난 17일 기준으로 서울대학교 1학년 1학기 휴학생은 모두 248명이나 된다. 2020년의 109명에서 2배가 넘게 늘어난 것이다.

자연계열이 130명으로 52.4%를 차지하고 사범대와 자유전공학부를 아우르는 인문·자연 통합계열도 89명으로 35.9%나 된다. 인문계열과 예체능 계열은 상대적으로 휴학 비율이 크게 낮았다. 

재학생들의 전국적인 대이동을 뜻하는 편입 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사교육 시장의 분석에 따르면 서울의 11개 주요대학의 편입 모집인원은 2024년 2847명으로 5년 전보다 59.1%나 늘어났다. 특히 의대로의 상향 이동이 활발한 자연계열의 편입 모집인원은 1759명으로 5년 전보다 무려 129.6%나 늘었다.

중하위권 학생이 상위권 대학으로 갈아탈 수 있는 기회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 소멸로 학생 확보에 비상이 걸린 지역대학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적인 소식일 수밖에 없다.

정부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 운영'은 의미가 없다. 반도체·AI를 앞세운 허울뿐인 융합학과와 계약학과만으로는 절박하게 필요한 이공계 인력을 충분히 양성할 수 없다.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의정(醫政) 갈등도 이공계 인력 양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한폭탄이다. 의대 쏠림의 현실도 암울하지만 학생과 전공의가 떠나버린 의대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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