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타령과 국가비상사태[꼬다리]

2024. 7. 3.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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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19일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주제로 열린 2024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서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이렇게 서울에 와 있으면 남편 밥은 누가 차려줘?” 지난 6월 11일 모정당 의원총회가 열린 국회 본청 예결위 회의장에서 한 남성 의원이 여성 의원과 악수를 하며 말했다. 질문을 받은 의원은 별다른 답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웅성댄 건 기자들이다. 특히 여성 기자들의 표정엔 당황스러움이 읽혔다. 입에선 “헐”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색해진 공기 탓인지 남성 의원은 혼잣말하듯 서둘러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이, 말 잘 못 했다. 밥은 알아서 차려 먹으면 되지.”

남성 의원을 비방하고자 이 일화를 꺼낸 건 아니다. 70대인 그를 굳이 이해해보자면 친근감을 표현하려다 실수를 한 셈이었다. 말을 정정하기까지 했으니 이만하면 ‘나이스’했다. 다만 괴담처럼 전해오는 ‘남편 밥 타령’을 국회에서, 그것도 여성 의원을 상대로 한다는 점이 충격이긴 했다. 국회의원조차 여성이란 이유로 이런 소릴 듣는데, 내겐 얼마나 많은 오지랖이 쏟아질까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박지윤 아나운서가 2019년 MBC 예능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영상이 재조명을 받았다. 박 아나운서는 “출장이나 해외 촬영을 하러 갈 때마다 SNS에 ‘아기들이 불쌍하다’, ‘애는 누가 보냐’는 댓글이 달린다”며 “단전에서 분노가 올라왔다”라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혹시 딸이 있다면 절대 꿈을 가지지 말라고 얘기해 달라. 꿈이 있어도 집에서 나중에 애만 키워야 하는데 무슨 소용이냐. 절대 자녀분에게 꿈을 가지지 말라고 하시라’라는 답글을 남겼다”고 했다.

게시 3일 만에 240만 조회수를 기록한 영상엔 “이래서 애 엄마가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다”, “60이 넘은 우리 엄마도 아직 여행을 가거나 하면 ‘남편 밥은 누가 하냐’ 소리를 듣는다”, “여자는 일하면서 애도 보고 집안일도 하고 남편 밥도 챙겨야 하는 게 맞벌이 현실” 등 댓글이 달렸다. 방송 이후 5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초등생 야간 자율학습시키기부터 최저임금 폐기, 여성 1년 조기 입학, 케겔 댄스까지 지난 한 달간 나를 포함한 가임기 여성들을 ‘딥빡(깊이 화남)’에 이르게 한 저출생 대책이 수두룩하다. 수백조원의 예산을 쏟아붓고도 한국의 출산율이 매년 역대 최저치를 경신하는 건 여성들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결과라는 점을 오히려 각종 정책이 입증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19일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인구전략부·저출생 수석실 신설과 더불어 각종 대책을 총망라해 내놨지만 ‘재탕 정책’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임신·출산 주체인 여성의 출산 기피 사유와 불평등 문제 역시 다뤄지지 않았다.

뇌리에 남은 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장 그 자체였다. ‘나도 아이도 행복한 세상’이라 적힌 진분홍 스튜디오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말하며 성차별을 몸소 실천하는 정부의 여성관을 보여줬다. 핑크 백드롭 앞에 나란히 앉은 윤 대통령과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의 사진을 본 지인은 “모욕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저출생 대책을 논하겠다고 나이 든 남성끼리 머리 맞댄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정책 결정권자들의 무의식 속에 ‘밥 타령’이 남아 있는 한 갈 길이 멀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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