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욱의 한반도 워치] 푸틴은 왜 평양의 해방탑에 헌화했을까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2024. 7. 3.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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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조선 해방’ 상징하는 해방탑… 북한에 지분 있다는 걸 과시
평양에 공산주의 체제 이식한 소련, 북핵 개발에서는 어머니 역할
폭주하는 북한의 기승전核… ‘확장 억제’ 전략만으로는 이제 어렵다
일러스트=이철원

과거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 모란봉산 먼발치에서 높이 30m 정도의 탑이 보였다. 꼭대기에는 붉은 오각별이 장식돼 있었다. ‘무슨 기념물이냐’고 북측 안내인에게 물었더니 “해방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2차 대전 말 조선을 해방시킨 소련 군대를 기념하기 위해 1947년 건설됐다’는 기록이 있었다. 오각별은 소련군 엠블럼이다.

해방탑에 새겨진 비문은 이렇다. ‘위대한 쏘련 인민은 일본 제국주의를 쳐부시고 조선 인민을 해방하였다.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흘린 피로 조선 인민과 쏘련 인민의 친선은 더욱 굳게 맺어졌나니.’ 러시아 측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소련군 약 4만70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말한다.

지난달 평양을 찾아간 푸틴은 짧은 당일치기 방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2000년에 방문했을 때처럼 해방탑 앞에 꽃을 놓았다. 모스크바가 북한에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걸 과시하려 한 것이다. 북한에는 평양과 지방에 소련군 참전 및 추모 기념탑이 13개나 있다.

소련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직후인 1945년 8월초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 동북 지방으로 진군했다. 8월말에는 소련군 부대가 평양에 진주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이 잉태된 시발점이었다.

평양에는 삽시간에 소련 공산주의 체제가 이식되기 시작했다. 8월 25일 소련군 사령부는 평양철도호텔에 본부를 설치하고 군정을 시작했다. 9월 19일에는 김일성 등 소련군 극동사령부 예하 88특수여단 소속 빨치산 50여 명이 원산에 상륙했다. 10월 14일에는 소련 해방군 환영 대회가 평양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됐다. 소련군 장성이 연단에 올라 위대한 김일성 장군을 소개하겠다고 언급했고, 새파란 젊은이 김성주(金成柱)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올라왔다. 이후 김성주는 김일성이 됐고,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결성했다.

79년 전 평양의 실상을 소개한 이유는 지난달 평양에서 체결한 북·러 군사동맹 조약 체결의 뿌리와 북한 핵무기의 태동을 되짚어 보기 위해서다. 1961년 흐루시쵸프와 김일성이 체결했다가 1996년 폐기된 ‘조소(朝蘇) 동맹 조약’은 이번에 푸틴과 김정은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으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자동 군사 지원 조항이 포함돼 군사 동맹 관계를 형성하면서 평양은 좌(左) 중국, 우(右) 러시아로 한·미·일 대응 틀을 구축했다. 유엔 대북 제재도 겁내지 않는 북한 외교의 만조기(滿潮期)가 형성됐다.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2024년 북러 조약 제10조는 경제와 과학기술 협력의 발전을 추동하는 분야로 ‘우주, 생물, 평화적 원자력, 인공지능, 정보기술 등’을 사례로 예시했다. 주목되는 분야는 우주와 원자력으로 북핵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일본 천황의 군대가 핵무기 두 발로 항복하는 상황을 지켜본 김일성은 6·25전쟁 때 미국의 핵 폭격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 그는 휴전 직후인 1954년 인민군 내에 ‘핵무기 방위 부문’을 설치했다. 1956년 물리학자 30여 명을 소련의 두브나핵연구소에 파견한 게 북핵 개발의 효시가 됐다.

북한은 1959년에는 조소(朝蘇) 원자력 협정을 체결했다. 1962년에는 영변에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고,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대에 핵 연구 부문을 창설해 인력 육성에 나섰다. 1965년에는 소련으로부터 IRT-2000 원자로를 도입했다. 그해 김일성은 평양을 방문한 조총련 대표단 접견에서 10년 안에 핵을 보유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요컨대 소련은 북한 핵 개발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영변에 원자력 연구소를 설치한 지 44년 만인 2006년 북한은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때부터 2017년까지 북한의 핵실험은 6차례 이어졌다. 북한은 ‘사실상의 핵무기 보유국’이다. 최소 50기에 이르는 핵무기와 투발 수단인 각종 미사일을 보유했다.

3대에 걸친 핵 개발은 할아버지 김일성이 디자인하고 체계를 구축했다. 아버지 김정일은 두 차례 핵실험으로 기반을 닦았다. 손자 김정은 집권 이후 4차례 핵실험으로 실전 배치 수준에 도달했다. 사회주의 정권 70년에 걸친 핵 개발로 북한은 지구상의 9번째 핵클럽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기승전 핵(核)이라는 키워드는 북한 정책에서 최우선 순위다.

1인당 국민소득 1200달러의 국가지만 북한과 러시아는 우주와 원자력 기술 교류와 협력을 강조한다. 우주 기술은 핵을 적국에 배달하는 역할을 한다. 평화적이란 형용사를 붙였지만 북한이 원전을 건설하지 않고 있는 만큼 경량화, 소형화된 핵무기 개발이 핵심이다.

김정은은 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 시정 연설에서 “절대로 먼저 핵 포기란 없으며 그 어떤 협상에서도 맞바꿀 흥정물도 없다”고 했다. 북핵은 김정은 집권 10년을 기점으로 양적 변화의 임계치에 도달하면서 질적 변화를 모색했다. 질적인 정책 변화의 핵심은 ‘핵 선제 사용’이다.

그동안 중·러가 유엔 대북 제재에 협조하면서 북핵과 미사일 개발은 속도가 억제됐다. 북한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던 중·러의 지도자들은 북한을 자극하지 말라고 미국을 견제하는 방조자가 됐다. 러시아가 북한에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레드라인을 넘을 경우 우리도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할지 여부는 한반도 안보에서는 부차적인 문제다. 북핵에 대한 한국의 선택이 핵심이다. 지난해 4월 워싱턴 선언에서 합의된 ‘확장 억제’ 전략만으로 폭주하는 북핵을 억지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때마침 워싱턴에서 불어오는 한국의 ‘떠밀린 핵무장론’은 새로운 바람이다. 한반도 핵 균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감성적·정치적 구호보다는 이스라엘식의 차분한 접근이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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