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거두라!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장석주 2024. 7. 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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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밤이었고, 함박눈이 쏟아졌다. 얼마나 큰 그리움이기에 함박눈은 저리도 쉬지 않고 내리는가?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풍랑이 이는 먼 바다와 먼 곳을 스치는 삭풍의 가느다란 기척뿐, 나를 둘러싼 사위는 어둠의 절벽이다. 내가 우주를 상상하는 존재라는 게 믿을 수가 없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생명의 필요에 부응하며 무언가를 갈망하고 욕망하며 사는 나! 나의 ‘살아 있음’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우주와 생명의 시원을 좇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의 연쇄 끝에 맺히는 것은 ‘나는 언젠가 죽는다, 나는 사라진다’는 결론이다. 다시 아득한 현기증마저 느끼며 어쨌든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애쓰던 자의 몸은 가늘게 떨린다.

 우리 살아서 맞는 나날은 기적

비 오다 그친 경기 북부의 쨍한 볕 아래를 걸어서 음식점에 가 콩국수를 먹었다. 동네 카페에서 아이스 라테를 마시는데, 카페 통창으로 짙푸른 숲이 통째로 들어온다. 어느덧 울울창창해진 숲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몇 달째 소식이 없는 딸을 떠올린다. 나는 깃털도 날개도 없으니 독수리처럼 공중을 날지 못한다. 부레도 지느러미도 없으니 심해를 떠돌 수도 없다. 그저 평생 두 발로 걷고, 손에 쥔 것은 언어와 한 줌의 상상력, 그리고 시 몇 편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순수의 전조’)라고 노래하건만, 내 눈에 모래는 모래이고, 한 송이 들꽃은 한 송이 들꽃이다.

우리가 살아서 맞는 나날은 기적이다! 수련이 피는 여름 아침도, 수련이 지는 여름 저녁도 다 기적이다. 세계의 모든 게 다 경이롭다. 내 눈은 아직 침침하지 않고 감각은 무디지 않으니, 정말 다행이다. 삶이 그렇듯이 예술도 경이 그 자체다. 아름다운 시에서 굳이 의미를 찾고, 이야기에서 동기, 도덕, 줄거리를 캐내려는 자들은 예술을 모른다. 시, 그림, 음악 같은 예술은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하기에 그걸 쪼개서 동기, 도덕, 줄거리를 분리하는 순간 예술의 드높은 완성은 무너지고, 홀연한 예술다움은 사라진다.

 삶은 예측 불가능…환원도 불가

좋은 예술은 해석이 불가능하다.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대지의 청지기’라는 별칭을 가진 웬델 베리는 <삶은 기적이다>에서 “가령 아름다움은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한 사실이 아니며, 양적인 수치도 아니다”(p.171)고 말한다. 무엇을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맥락에서 예술은 해석을 거부한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참이고 그걸 해석하는 행위는 예술과 무관한 일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공산품과는 다르다. 공산품은 분해하고 망가진 데를 수리해서 쓸 수 있지만 유기체는 해체하는 즉시 죽는다. 강아지가 아프다고 생명을 해체하고 구조와 성분을 분석한 뒤 조합하더라도 죽은 것은 살려낼 수 없다. 공산품이 제조에 의해서만 나오지만 유기체는 무에서 탄생한다. “개체 피조물의 생명은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다.”(웬델 베리, p.64) 생명의 고유한 전체성은 그가 있는 장소, 태어난 시간과 더불어 번성한다. 생명은 대체할 수 없는 것, 그 자체로 의미의 광채를 내뿜는 까닭에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도 없다.

누군가 감히 삶을 안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의심할 거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물음에 감히 ‘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불신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유물론자들은 모든 현상을 물리 법칙으로 환원시킨다. 과학 맹신주의에 기울어진 이들의 논리는 명석해 보이지만 그들은 진짜로 몽매하거나 우리를 속이려는 사기꾼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삶을 해석 가능한 하나의 덩어리로 여긴다. 그들이 삶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어떤 물리 법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은 불가해하고, 우리는 ‘알지 못함’이라는 한도 내에서 제 삶을 꾸릴 따름이다. 삶은 예측 불가능하며 동시에 환원 불가능하다. 알지 못함 속에서 사는 까닭에 우리가 살아내는 나날은 기적이다. 삶과 예술은 하나다. 내가 삶을 모르듯이 50년 동안 시를 썼지만 시도 모른다. ‘알지 못함’이라는 한도 내에서 모름을 견디며, 나는 한 편의 시를 빚는다. 누군가 시를 해석해달라고 요청할 때만큼 곤혹스러울 때는 없다.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의 유한함은 우리가 언젠가 끝이 예정된 인생을 산다는 뜻이다. 인간 수명이 의학의 발달과 고른 영양 등을 섭취하면서 획기적으로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인생의 짧음’은 여전히 불변의 진리다. 지나간 것은 되돌릴 수가 없다. 인생의 순간과 그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은 오직 단 한 번만 겪을 수 있다. 지나온 과거는 죽고, 죽은 게 부활하는 법은 없다. 삶이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훨씬 좋았던 옛날은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서만 빛난다. 그 선상에서 태어남과 죽음은 우리가 겪는 엄연한 실존 사건이다.

시간 안에서 탄생하고 죽는 존재인 인간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죽음 불안에서 몸부림치는 인류가 고안해낸 게 종교라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죽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널리 퍼뜨렸다. 내세와 천국, 영혼 불멸 따위가 그것이다. 내가 아는 지식의 범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은 실현 불가능한 허상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가슴에 품고 살아라! 이 라틴어는 오늘을 붙잡으라는 뜻이다. 인생이 짧음을 비탄하면서 머뭇거리거나,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예하는 자는 자주 현재를 놓친다. 그들에게 해줄 말은 단 하나, 현재를 놓치지 말고 비범한 삶을 살라는 것. 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시간이 흘러, 내일이면 장미는 질 테니까! 기억하라, 오늘이 가고 나면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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