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잘 아플 권리’를 위하여 [한겨레 프리즘]

이정연 기자 2024. 7. 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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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지겨워."

그는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한다.

질병과 질병 배제의 사회에 질식하지 않고, 질병을 안은 몸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낼 수 있는 '권리' 말이다.

의-정 힘겨루기는 '잘 아플 권리'를 환자들로부터 앗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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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뒤쪽)이 지난달 2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의 의료계 비상상황 관련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위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앞쪽은 보건복지부 조규홍 장관과 박민수 2차관. 연합뉴스

이정연 | 인구·복지팀장

“어휴, 지겨워.”

혼잣말이 늘었다. 의과대학 정원 증원 정책으로 빚어진 일련의 사태들을 보도하는 취재 팀장을 지난 3월 중순부터 맡아온 터였다. 몇몇 동료들은 내가 팀장을 맡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몇주 고생하겠네” “어떻게든 곧 소강상태가 되겠지” 하며 어깨를 토닥였다. 그로부터 100일이 훌쩍 지났다.

의-정 갈등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우여곡절 끝에 의대 정원은 27년 만에 1509명 늘었지만 의대생, 전공의, 의대 교수, 의사들은 여전히 증원을 백지화하고 해당 정책을 원점 재검토할 것을 주된 요구로 내세운다. 수련병원 이탈, 일시적 휴진에 이어 대형병원들의 무기한 휴진까지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끝날 줄 모른다. 이들을 멈춰 세울 카드가 마땅치 않은 정부는 ‘원칙적 대응’이라는 초기 방침을 스스로 폐기한 듯하다. 넉달 넘게 수련병원을 이탈한 전공의도 돌아오기만 한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기세다. 그래 봤자 전공의들은 콧방귀를 뀌고 있지만.

그날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였다. 지난달 2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의료계 비상상황 관련 청문회’를 열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의사단체는 의사단체대로 제 할 말만 하고 도무지 그 사이의 거리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료 공백이 장기화하다 못해 일상화가 되어가는 ‘비상상황’에 청문회는 고성과 공방, 해명과 변명으로 채워졌다. 청문회 생중계 화면을 보다, “지겨워”라는 혼잣말을 또 내뱉고야 말았다.

“도대체 환자가 병원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이토록 다행스러워하고 안도해야 합니까? 우리의 몸이 질병으로 손상당했다고 해서, 삶까지 손상당해야 합니까?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습니까?”

청문회가 한창인 시간, 국회 밖에서의 일이었다. 이날 오전 국회 앞에서 40개 환자·시민·종교단체가 모여 긴급기자회견을 했다. 서울대병원 희귀난치질환센터에서 진료받는 환자이기도 한 조한진희씨의 발언이었다. 의료 공백 속에서 진료를 받으며 안도했던 자신과 동료의 경험을 내어놓으며 그는 외쳤다. “힘겨루기 하느라 우리 사회 아픈 몸들을 이토록 불안하고 위태롭게 밀쳐 내도 되는 겁니까. 의료가 선택적인 사치품 같은 자원인가요?” 기자회견문에 첨부된 조한진희씨의 ‘발언문’을 읽었을 뿐인데, 목소리가 쟁쟁하게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지겨울 수 없는 고통과 불안이었다. 동료들이 전한 의료 현장의 현실이 그랬다. 의료 취약지에서 곧 사라질지 모르는 응급실을 지키는 의사는 “여기가 사라지면 한달에 1명 이상이 무조건 더 죽습니다”라고 하고, 밭에서 일하다 진드기에 물려 온몸에 피딱지 앉은 어르신은 공중보건의마저 없는 곳에서 그저 참고 참다 먼 곳의 병원을 찾았다. 어린이 환자를 보는 의사는 상태가 심각한 환자를 보낼 병원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고백이자 반성이다. 의-정 갈등에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릴 만큼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이들의 고통마저 지겨워했다는 고백. 환자이면서도 존엄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의료 공백’에 따른 공포가 어느 만큼일지 가늠하지 못했다는 반성. 조한진희씨는 자신의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한다. 질병과 질병 배제의 사회에 질식하지 않고, 질병을 안은 몸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낼 수 있는 ‘권리’ 말이다. 의-정 힘겨루기는 ‘잘 아플 권리’를 환자들로부터 앗아가고 있다.

환자단체들이 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정부·의사단체에 진료 정상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연다. 의료 공백 뒤 기자회견이나 기자간담회 등의 소규모 집회는 있었지만, 환자단체가 참여 인원 1천여명을 예상하는 대규모 집회를 여는 건 처음이다. 환자와 그 보호자들은 더는 참을 수 없어 거리로 나선다고 했다. 정부도 의사단체도 지겨운 힘겨루기를 멈추고, 거리로 나선 환자들의 외침에 서둘러 답해야 할 것이다.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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