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공화국 전선

정유진 기자 2024. 7. 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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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프랑스 대선 당시, 1차 투표 직전까지만 해도 좌파 후보인 리오넬 조스팽 총리와 우파 후보인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맞대결이 될 것이라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조스팽이 1차 투표에서 탈락한 대신, 백인우월주의자인 데다 홀로코스트를 “사소한 일”이라 주장하는 극우 성향 장마리 르펜이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결선에서 시라크와 경쟁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130만여명의 시민들이 반르펜 시위를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조스팽 총리를 비롯해 프랑스의 모든 좌파 정치인들은 지지자들에게 공화국 가치를 지키기 위해 눈 딱 감고 시라크를 찍어 달라고 호소했다. 극우 앞에는 좌도, 우도 없다는 이른바 ‘공화국 전선’(Republican Front)의 형성 덕에 시라크 대통령은 82.2%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르펜을 누를 수 있었다.

그로부터 22년이 흐른 지금,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새 역사를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치러진 조기 총선 1차투표에서 RN은 33%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오는 5일 치러지는 결선 투표에서 의석 과반을 차지하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마린 르펜은 나치 지지자를 방불케 했던 아버지와는 다르다. 반유대주의와 거리를 두기 위해 아버지까지 당에서 제명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계약적 관계를 부정하고 프랑스인을 핏줄로만 규정하려는 RN의 민족주의 노선은 이 나라가 자랑스러워하는 공화주의 가치에 여전히 반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반유대주의는 철회했지만 인종차별주의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며, 그 타깃이 무슬림과 이민자로 축소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RN이 프랑스 최초의 극우 집권 정당이 될 수 있을지는 또다시 ‘공화국 전선’에 달려 있다. “역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호소 덕에 결선에 오른 3위 후보가 사퇴를 선언한 선거구가 160여곳에 달한다고 한다. ‘반르펜’ 표가 분산돼 RN 후보가 당선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극우 정당의 기세는 2002년보다 더욱 거세고 ‘공화국 전선’의 대오는 그때보다 힘이 없어 보인다. 과연 프랑스는 이번에도 극우의 집권을 막아낼 수 있을까.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의 선거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다. AFP연합뉴스

정유진 논설위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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