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달맞이꽃 내음 속 지하철

2024. 7. 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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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산책을 좋아한다.

밤에는 낮보다 짙은 풀 향기가 난다.

달맞이꽃은 낮에는 오므라들고 밤에만 꽃을 피운다.

한여름밤 달맞이꽃과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달맞이꽃의 잔상 위에 슬며시 어리는 얼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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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산책을 좋아한다. 밤에는 낮보다 짙은 풀 향기가 난다. 이따금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선물처럼 반갑다. 뙤약볕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면 한낮의 치열했던 호흡도 다듬어지는 것 같다. 그 분위기가 좋아서 약속이 있는 날 늦은 저녁이면 일부러 마장동에서 내려 청계천을 따라 집까지 걷는다.

어젯밤 산책길은 평소보다 특별했다. 길모퉁이 화단에서 올여름 처음 마주한 노란 달맞이꽃 덕분이다. 달맞이꽃은 낮에는 오므라들고 밤에만 꽃을 피운다. 그래서 영어로는 'Evening Primrose', 일본에서는 '석양의 벚꽃'으로 불린다. 누구라도 캄캄한 밤에 네 장의 꽃잎을 활짝 드러낸 신비로운 자태를 마주한다면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여름밤 달맞이꽃과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달맞이꽃의 잔상 위에 슬며시 어리는 얼굴이 있었다. 우리 직원들이다. 고요한 밤에 더 분주한 모습이 달맞이꽃을 닮았다.

서울지하철의 밤은 시민의 아침을 위한 준비로 빼곡히 채워진다. 새벽 1시 운행 종료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면 출구마다 셔터가 내려진다. 모든 승객이 빠져나간 텅 빈 역이 낯선 것도 잠시, 본격적인 청소 시작이다. 대합실부터 승강장, 화장실, 계단까지 구석구석을 누비며 먼지를 걷어낸다. 30년도 더 된 낡은 바닥이 지금도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건 한결같은 관리가 비결이다. 승강장 안쪽 터널에서는 시설물 점검이 한창이다. 터널은 열차 운행 중에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열차 운행이 종료되는 새벽 1시부터 첫차가 운행을 시작하는 5시 30분 사이에 모든 점검과 보수가 이뤄져야 한다. 빠듯한 스케줄이지만 대충은 없다. 초음파를 이용해 레일 내부의 결함을 찾아내는 레일탐상차가 터널을 오가고, 궤도·전기·신호·통신시설을 종합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종합 검측차도 발걸음을 재촉한다.

같은 시각 운행을 마친 열차가 숨을 고르는 차량기지는 조명을 훤히 밝히고 아침에 운행할 차량 점검에 여념이 없다. 작동은 잘되는지, 혹시 고장 난 곳은 없는지 정성 어린 손길이 더해진다. 그렇게 출고되는 첫차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주목받지도 못하는 일이지만, 지하철을 안전사고 없이 정시에 운행하기 위해 애쓰는 직원 2만여 명의 마음이 가득 실려 있다.

비단 우리 직원들만은 아니다. 모두가 잠든 밤 7월의 달맞이꽃처럼 어둠을 밝히는 이웃들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신선한 식자재를 문 앞까지 배달하는 택배기사님, 골든타임을 다투며 위급한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수고로운 땀방울로 거리를 깨끗하게 단장하는 환경미화원, 암흑으로 뒤덮인 바다에서 집어등을 환하게 밝히고 생선을 잡아 올리는 어부, 밤새워 보초 근무를 서는 국군 장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눈꺼풀이라고 했던가. 그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고 밤을 지켜내는 진정한 밤의 히어로들이다. 덕분에 감사한 일상의 아침을 맞이한다. 그들의 고단함 위에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세워진다. 오늘 그 히어로들을 만난다면 고마운 인사를 건네보자. "덕분에 살아갑니다."

[백호 서울교통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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