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고 싸우면 나만 다친다”

정인환 기자 2024. 7. 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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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는 이랑에 뭔가를 심고 고랑은 사람이 밟고 다니는 데를 이릅니다."

주말농장에서 공동경작을 하는 7명 가운데 '고랑'과 '이랑'을 구분해 말하는 사람은 자영농을 하다 올해 '의거 귀순'한 '대파-토마토-작두콩-수세미 작목반장'뿐이다.

나머지 6명은 '이랑'이란 말은 거의 쓰지 않고, '고랑'만 주로 쓴다.

처음엔 두어 고랑으로 시작하셨는데, 조금씩 고랑 수를 늘리며 영역을 넓혀 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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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들]경기 고양 편
주말 지나면 풀 반 작물 반… 상추·고수 수확 못해도 수세미·아욱·작두콩 ‘싱싱’
2024년 6월22일 비 오는 텃밭에 흐드러지게 핀 고수 꽃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랑에 뭔가를 심고 고랑은 사람이 밟고 다니는 데를 이릅니다.”

최○○ 독자께서 ‘고랑’과 ‘이랑’을 바꿔 쓰는 게 맞지 않냐고 전자우편으로 물으셨다. 주말농장에서 공동경작을 하는 7명 가운데 ‘고랑’과 ‘이랑’을 구분해 말하는 사람은 자영농을 하다 올해 ‘의거 귀순’한 ‘대파-토마토-작두콩-수세미 작목반장’뿐이다.(제1506호 참조) 나머지 6명은 ‘이랑’이란 말은 거의 쓰지 않고, ‘고랑’만 주로 쓴다. 밭 한 고랑, 두 고랑 하는 식이 입에 붙어서다.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을 보니 ‘고랑’은 “밭 따위를 세는 단위”란 뜻도 있다.

텃밭 주인장(밭장 친구) 소개로 3년여 전부터 농사를 함께 짓는 어르신이 계신다. 처음엔 두어 고랑으로 시작하셨는데, 조금씩 고랑 수를 늘리며 영역을 넓혀 나가셨다. 급기야 최근엔 공동경작하는 우리 밭 주위의 빈 땅까지 개간하시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 밭에 가니 우리 호박밭 옆 나지막한 언덕까지 밭이 돼 있었다.

뭔가 ‘포위’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던 차에 밭장이 말했다. “우리도 합시다.” 밭장과 막내가 곡괭이와 삽을 들고 옥수수밭 위쪽으로 향하더니, 순식간에 고랑 두 개를 냈다. 어르신은 경사면 그대로 풀만 잡고 콩을 심으셨는데, 우리는 계단식으로 ‘다랑이 밭’을 만들었다. 어르신의 ‘장군’에 대한 우리 식 ‘멍군’이다.

날이 더워지면 주말 하루만 가는 도시농부의 텃밭은 곧장 풀밭이 된다. 10여 년 텃밭 경험은 ‘풀하고 싸우면 나만 다친다’는 깨달음을 얻게 했다. 풀을 다 뽑아준 밭의 작물보다 풀과 함께 크는 작물이 뙤약볕과 장마철을 더 잘 버텨낸다는 뜻밖의 사실도 알게 됐다. 언젠가부터 이즈음이 되면 ‘과하다’ 싶은 것만 뽑고, 나머지는 작물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게 됐다.

마늘·양파·감자를 거둘 때가 됐다. 하지 이튿날인 2024년 6월22일 캐기로 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빗발이 제법 거셌다. 밭장과 이른 점심을 먹고 도착하니, 비 내리는 밭이 풀 반 작물 반으로 초록초록 예쁘다. 볕 잘 드는 쪽에 만든 상추밭 상추는 일주일 새 꽃대를 두어 뼘이나 올렸다. 꽃대를 올린 상추는 써서 못 먹는다. 반면 오전에만 잠깐 볕이 드는 쪽의 상추는 아직 여리여리해 2~3주는 더 먹겠다 싶다.

기세 좋게 줄기를 뻗은 수세미와 작두콩이 비를 맞아 싱싱하다. 군데군데 꽃을 피운 아욱은 잎이 아이 손바닥만큼 커졌다. 주렁주렁 달린 연초록 방울토마토는 1~2주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곁에선 연보랏빛 꽃을 밀어내며 가지가 자라고 있다. 무성한 잎 사이로 호박도 서너 개 열렸다. 오이는 병에라도 걸렸는지 잎이 거반 사라졌다. 고수는 수확도 몇 번 못했는데 벌써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평상에 누워 유튜브로 옛 노래를 메들리로 듣다가, 잠시 비가 주춤한 새 서둘러 마늘과 양파를 캤다. 수확량은 그야말로 종잣값도 안 나오는 수준이다. 김치냉장고용 작은 김치통 하나도 채우지 못했다. 캐낸 마늘과 양파는 말리기 위해 바닥재를 깐 평상 아래에 널었다. 씨앗 한 봉지를 탈탈 털어 뿌린 바질이 모종만큼 자란 게 보인다. 비에 젖은 흙을 통째로 퍼서 열무 캐고 놀리던 밭 한 고랑에 바질 모종을 옮겨 심었다. 올해는 바질페스토를 만들 수 있을까? 덕지덕지 진흙 묻은 장갑을 벗었는데도 은은한 바질 향이 가시질 않는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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