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벚꽃동산'이라는 공간콘텐츠

임대근 한국외대 컬처·테크융합대학장 2024. 7. 2.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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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한국외대 컬처.테크융합대학장)


화제의 연극 '벚꽃동산'을 봤다. 배우 전도연의 연극무대 복귀가 주목받았다. 연극무대에 오른 것은 27년 만이라고 한다. 주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가 연극에 도전한다는 일이 화제가 됐다. 연출가 사이먼 스톤도 빼놓을 수 없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연출로 세계 각국의 관객과 만나고 있다. 원작자 안톤 체호프도 입에 오르내린다. 이 작품은 그의 몇 안 되는 장막극 중 하나다.

원작은 러시아 귀족의 몰락을 그린다. 사이먼 스톤은 이를 동시대 한국의 재벌 이야기로 바꾼다. 재벌 집안의 딸 송도영(전도연 분)은 10여년 만에 미국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벚나무가 있는 멋진 저택이다. 열여섯 생일에 아버지가 선물한 바로 그 집이다. 그녀는 그 집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남편과 헤어진 뒤 도피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집안은 몰락하는 중이다.

연극은 훌륭한 배우들의 열연과 흥미로운 스토리, 정극이지만 다양한 소재와 장치로 지루하지 않은 웃음을 선물한다. 한 여성의 존재론적 고뇌, 한 가정의 비극적 서사, 이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계층갈등, 젠더갈등, 세대갈등을 한데 버무려 보여준다. 외국인이 연출을 맡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무대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무엇보다 이 연극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장치는 공간의 배치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는 저택만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저택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간의 배분과 활용을 통해 놀라운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박공 형태의 2층집 외관은 독특하다. 오른쪽 지붕의 한 면은 땅까지 흘러내리면서 2층과 지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든다. 전면으로 나 있는 출입문은 전체가 창이다.

삼각형과 직사각형을 각각 2층과 1층으로 연결해 붙여놓은 것 같은 저택은 창틀을 따라 모두 12개 프레임으로 나뉜다. 창틀은 저마다 프레임이 돼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좌우를 넘나들고 1층에서 2층까지 상하를 오르내리면서 이야기를 펼친다. 프레임은 영화의 스크린 또는 웹툰의 한 칸처럼 작동하면서 관객의 시선을 끌고 다닌다. 궁지에 몰린 송도영은 오른쪽 귀퉁이 프레임까지 쫓기다 결국 좁은 창고로 들어간다.

무대는 저택의 내부 프레임은 물론 외곽 라인을 잇는 계단과 지붕, 저택의 앞마당까지 이야기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원근과 심도의 층위가 서로 얽히면서 관객의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다. '벚꽃동산'은 무대극이지만 영화와 웹툰의 효과를 가져와 공간을 구조화함으로써 상상을 넘어선 이야기의 흐름을 보여준다.

사실 콘텐츠는 특정한 공간 위에서 존재한다. 공간을 떠난 콘텐츠는 없다. 공간콘텐츠는 하나의 장르처럼 분류되는 개념이 아니다. 모든 콘텐츠는 공간콘텐츠다. 콘텐츠가 활용하는 공간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평면과 입체, 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다. 디지털 평면, 디지털 입체, 아날로그 평면, 아날로그 입체가 콘텐츠의 네 공간이다.

웹툰, 웹소설, 영화, 게임 등은 대부분 디지털 평면이다. VR(가상현실) AR(증강현실) 등은 디지털 입체다. 종이책이나 잡지 등은 아날로그 평면이다. 공연, 전시, 축제, 테마파크 등은 대부분 아날로그 입체다. 어떤 콘텐츠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어떻게 분배하고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에서 기획과 제작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벚꽃동산'은 공간콘텐츠로서 뛰어난 사례로 남을 것이다. 무대의 중앙에 악단을 배치하고 무대 전면만 좌우의 일직선으로 설정해 공간을 배치함으로써 볼거리에 실패한 뮤지컬 '시카고'와 매우 대조적이다. 물론 악단 사이로 출입문을 두거나 하면서 다양성을 꾀해보려고 했지만 전체적으로 공간의 단조로운 분배를 벗어나지 못했다. '벚꽃동산'은 '시카고'가 소홀히 여긴 공간콘텐츠라는 특징을 훌륭히 성취했다. (임대근 한국외대 컬처·테크융합대학장)

임대근 한국외대 컬처·테크융합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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