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덕에 이겼어”… 득점보다 헌신을 더 중시한 히딩크, 내 인생의 보물

최보윤 기자 2024. 7. 2.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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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57] 前 축구 국가대표 이영표
은퇴 후 축구 행정가와 해설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이영표가 11년 전 자신의 은퇴 경기에 쓰인 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은퇴 공에는 당시 팀 동료들의 사인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고운호 기자

“붉은 악마의 구호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 그대로였어요.” 이영표(47)에게도 2002 한·일 월드컵은 ‘정말 가능할까’ 생각했던 일이 하나하나 이뤄진 꿈 같은 일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선연한 4강 진출을 비롯해 네덜란드 PSV아인트호벤으로 이적, 이후 영국 프리미어리그 진출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능할까’ 생각했던 일이 하나하나 이뤄졌다. 이영표는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해준 인생의 첫 번째 보물로 ‘거스 히딩크’를 꼽았다.

◇나의 첫 번째 보물 히딩크 감독

2002년 월드컵, 한국팀의 결정적 순간마다 이영표가 있었다. 16강 진출의 운명을 가른 포르투갈전서 박지성이 터뜨린 결승골을 어시스트한 것이 이영표였고, 이탈리아와 벌인 16강전에서 117분 혈투 끝에 터진 안정환의 역전 헤딩골 역시 이영표가 올린 공이었다. 이영표는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인 거스 히딩크 감독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성과”라고 말했다.

한일 월드컵 1년 전 프랑스와 치른 대륙간컵에서 한국은 0대5로 대패했다. 히딩크 감독에게도 ‘오대영’이란 별명을 안긴 치욕적 경기. “태어나 처음 본 터치와 템포였어요. 프랑스 선수들의 방향·각도·타이밍 그 어느 하나도 전혀 예상을 못하겠더라고요. 아무리 상대가 전 대회 월드컵 우승팀이라고 해도, 세상에 이런 축구가 있었나 하고 자괴감마저 들었으니까요.”

주저앉은 팀을 일으킨 건 히딩크였다. “경기가 끝나고 혼날 줄 알았는데, 저한테 와서 ‘체력이 좋다’고 칭찬해주더라고요.” 이후 일들에 대해 이영표는 “최고로 비참하면서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신기했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은퇴 후 축구 행정가와 해설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이영표가 11년 전 자신의 은퇴 경기에 쓰인 공으로 허벅지 트래핑을 선보이고 있다. 은퇴 공에 팀 동료들이 빽빽하게 사인했다. /고운호 기자

“각종 훈련을 하면서 히딩크는 ‘킵더볼(keep the ball)’을 자주 외쳤어요. 처음엔 공을 갖고 있으란 얘긴 줄 알았더니, 서로 공을 패스하며 상대에게 뺏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어릴 적 드리블하며 다른 이를 따돌리는 재미로 축구에 흥미를 붙였던 그가 패스의 중요성을 처음 깨달았다.

이영표는 골을 넣는 선수는 아니다. 그러나 항상 빛났다. 그가 빛난다는 것을 알려준 이가 히딩크였다. “감독님이 월드컵 때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항상 ‘오늘 너 때문에 이겼다’며 안아주셨어요.” 카메라가 비추지 않아도 공을 갖고 있든 갖고 있지 않든 혼을 바쳐 뛰는 이들을 히딩크는 놓치지 않았다. “욕심 없는 선수가 어디 있겠어요. 경기에는 이기적으로 움직이면서 결정적 득점원 역할을 하는 선수가 한두 명은 꼭 필요해요. 하지만 나머지 8~9명은 정말 헌신해야 해요. 우리의 득점이라 인식하고 묵묵히 뛰는 선수가 많을수록 강한 팀이 되는 것이죠.”

히딩크와 울고 웃으며 1년이 흐르고, 프랑스와 다시 만났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세요? 다들 ‘어 뭐지? 왜 보이지?’ 했어요. 프랑스팀의 움직임이 예측이 되는 거예요. 이번엔 우리 스스로에게 놀랐지요.”

1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의 한 카페 앞에서 이영표 대한축구협회 전 부회장이 가져온 보물. 은퇴 마지막 경기날 동료들이 사인해 선물한 공. /고운호 기자

◇은퇴 경기에서 썼던 공

흰 반팔 티셔츠와 하얀 진팬츠 차림으로 기자와 만난 이영표는 한쪽 손에 공을 들고 있었다. 선수들의 사인으로 빽빽했다. 2013년 10월 28일.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밴쿠버 화이트캡스 수비수로 마지막 경기 때 썼던 공이었다. 한국·유럽·중동을 거쳐 북미까지 14년간 4대륙 프로리그를 정복한 스타 플레이어의 최종전을 위해 구단은 이날 경기 티켓과 팸플릿 등에 이영표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 밑엔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영광(our all, our honour)’이란 문구도 새겼다.

경기 중 페널티킥(PK) 기회가 오면 이영표가 차고 은퇴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는 방침도 정해졌다. 전반 43분 상대의 반칙으로 정말 PK가 선언됐다. 그때 팀 동료 카밀로 산베조(브라질)가 다가왔다.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카밀로는 리그 득점왕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카밀로가 해냈죠! 팀 역사상 처음으로 MLS 득점왕 타이틀도 땄어요. 제가 골을 넣은 것보다 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더군요.” 카밀로는 이영표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공을 바쳤고, 그 장면은 MLS 리그 역사에 기록됐다. 이영표가 들고 있는 공이 바로 그때의 공이었다.

2013년 이영표(왼쪽) 은퇴 경기서 페널티킥 성공으로 MLS 득점왕에 오른 팀 동료 카밀로 산베조가 이영표에게 공을 바치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MLS 밴쿠버 화이트캡스 구단 홈페이지

“제가 월드컵에서 여러 도움(어시스트)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 나에게 공을 패스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골이 탄생할 수 있게 상대 진영에서 공을 처음으로 뺏어낸 선수, 공이 들어가기 전까지 상대를 밀착 방어하며 수비해준 선수 역시 박수받아 마땅하고요.”

패스를 성공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을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받기를 원하는지 항상 생각해야 해요.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죠. 서로의 마음을 읽고 배려하는 그 두 지점이 만나면 ‘나이스 패스’가 됩니다. 내 욕심만 앞세워,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는 타이밍만 찾으면 ‘패스 미스’가 나오게 되고요.”

이영표가 지난 3월 마라톤 42.195km를 완주할 때 신었던 마라톤화. /고운호 기자

◇축구화 대신 갈아 신은 마라톤화

이영표는 “요즘엔 저를 육상 선수로 아는 분도 있다”면서 웃었다. 공과 함께 가져온 형광 주홍빛 운동화는 마라톤용 러닝화였다. 지난 3월 서울 마라톤 42.195㎞를 완주할 때, 작년 춘천 마라톤 10㎞를 뛸 때 신었던 운동화다.

처음엔 ‘버킷리스트’처럼 딱 한 번 완주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준 동료를 보면서, 자신도 다른 이들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축구에 커버 플레이라는 게 있거든요. 주어진 포지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혹시 동료가 실수했거나 상대에게 밀릴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죠.”

그가 속한 러닝 클럽 ‘언노운 크루’는 ‘연예인 기부왕’ 션을 필두로 기부 마라톤을 비롯해 연탄 배달 등 각종 봉사와 기부를 한다. 2020년부터 매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 유공자를 기리는 기부 마라톤 ‘815런’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각종 기업 후원과 일반인 참가자 기부 등 38억원 가까운 기금을 모았다. 이를 통해 한국해비타트와 함께 독립 유공자 후손을 위한 집을 짓는다. 올해 ‘815런’에는 션이 81.5㎞를 뛰는 동안 이영표를 포함한 40명의 러닝 메이트가 8.15㎞씩 함께 뛸 예정이다.

“돈 많이 벌고 남들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할 줄 알았거든요. 정말 좋았죠. 그런데 지속되지 않았어요.” ‘남들이 보는 나’에 취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행복하냐고요? 이 사진을 보시면요….” 얼마 전 전북 정읍으로 내려가 독립 유공자 후손들을 위한 집 14호를 함께 지은 뒤, 동료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이었다. 그는 또 다른 인생의 보물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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