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59] IT 업계의 진화적 군비경쟁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2024. 7. 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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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이 핵무기 군비경쟁에 사활을 걸던 1970년대, 책 ‘이기적 유전자’로 잘 알려진 R. 도킨스는 두 생명체의 경쟁적인 진화에 ‘진화적 군비경쟁(arms race)’이란 이름을 붙였다. 사자 같은 포식자 빠르고 강하지만, 얼룩말 같은 초식동물은 꽤 빠르게 요리조리 도망쳐서 공격을 피한다. 포식자와 먹이 사이에 진화적 ‘군비경쟁’이 존재했고, 그 결과 약한 초식동물도 생태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된다. 나방은 포식자를 속이기 위해 날개에 가짜 눈(目) 무늬를 다는 방향으로 진화했는데, 눈이 멀어 초음파를 이용해 날아다니는 박쥐에게는 이런 속임수가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나방 중에는 박쥐를 교란하는 초음파를 발생시키는 나방이 생겨났다.

기생충과 숙주 사이에도, 인간과 바이러스 사이에도 진화적 군비경쟁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아예 상아가 없는 코끼리가 많이 태어나고 있는데, 이 역시 상아를 채집하기 위해 사냥을 일삼던 인간과 코끼리 사이에 진화적 군비경쟁이 생겼기 때문이다. 진화적 군비경쟁의 사례는 사회 현상에서도 발견되는데, 같은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 있으면 서로 경쟁해서 전반적으로 맛과 서비스가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원조 맛집과 비슷하게 맛을 내지 못하면 바로 망하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노력해서 살아남기 때문이다. 강성 노조가 생긴 뒤에 회사가 더 많은 이윤을 내게 된 경우도 이런 사례다.

우리나라 정보통신(IT) 업계는 최근까지 한글과 민족주의적 문화의 보호막 속에서 성장해 왔다. 한글파일(hwp)이 국제적으로 통하지 않아 불편해도, 정부에서 채택한 국내 표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 식이다. 그런데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은 상당한 한글 데이터를 학습해서 한글 인공지능 서비스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많은 사용자는 챗GPT와 딥엘(DeepL)의 한글 번역이 네이버 번역보다 더 낫다고 평가한다. 한국 기업들은 정부 지원을 간절히 구하거나 자국 AI(Sovereign AI) 연합을 만들어 대항하려고 하는데, 이제 보호막이 사라졌고 강력한 포식자 앞에 맨몸으로 서게 되었음을 자각해야 한다. 사활을 건 경쟁을 통해 스스로 진화하지 않으면 기술 생태계에서 도태될 시점이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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