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38] 전쟁과 생선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4. 7. 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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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도미가 있는 정물화, 1808~12년, 캔버스에 유채, 44.8 x 62.5 cm, 휴스턴 미술관 소장.

밤낚시다. 흰 거품과 함께 파도가 밀려오는 어두운 바닷가 둔덕에 고기 예닐곱 마리를 잡아 쌓아뒀다. 탱탱한 몸통과 반짝이는 은빛 비늘, 선홍색 뚜렷한 아가미, 물기를 머금은 맑은 눈알은 신선한 생선의 필수 요건이니, 누군가는 머지않아 맛있는 도미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 생선들과 눈을 맞추다 보면 딱히 입맛이 당기지 않는다. 불과 한두 시간 전에 바닷속을 자유롭게 누비며 파도를 따라 유영했을 물고기들이 순식간에 낚시에 걸려 뭍으로 던져진 뒤 영문을 모르고 숨을 할딱이다 죽어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색이 묻어날 듯 선명한 눈알에서 체념한 물고기의 마지막 한숨이 느껴진다면 지나친 감정이입일까.

스페인 미술의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는 1808년에서 1812년 사이, 즉 스페인 왕실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에 대항해 온 스페인인이 몸을 던진 스페인 독립 전쟁 중에 이 그림을 그렸다. 고야는 일찍이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을 받아들여, 왕실 화가로 봉직하면서도 사회 비판적 의식이 있는 지적인 화가였다. 그러나 이름 모를 질병을 앓은 뒤 청력을 완전히 잃은 고야의 화면은 갈수록 어둡고 침울해졌다. 어쩌면 깊은 침묵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암울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전쟁이란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 속에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나락으로 떨어지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한때 살아 움직이던 이들이 주검이 되어, 마치 낚시로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거리에 쌓이고 나면, 그 속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이 없다.

서양미술사에서 생선을 그린 정물화는 대부분 풍요와 욕망을 상징한다. 그러나 전쟁 중 고야가 그린 생선에는 풍요가 아닌 파멸이, 욕망이 아닌 연민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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