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 규명’ 요구 봇물…농성장의 파수꾼이 되다

한겨레 2024. 7. 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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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9화 135일의 농성과 의문사 자료집

1988년 의문사 진상규명 요구하며
‘35명 의문사’ 가족 135일 동안 농성
강제징집 뒤 프락치 활동 강요 등
석연찮은 정황에도 모두 자살 처리
학생·노동 운동가 의문사도 잇따라

이소선 어머님 요청으로 농성 지원
한 맺힌 유가족 법정서도 분노 폭발
그들 사연과 고통 들으며 ‘연민의 정’
유족 인터뷰에 현장·부검 사진 모아
첫 자료집 ‘~제명에 못살리라’ 발간

1988년 12월19일 오후 서울 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반고문, 반폭력, 인간선언대회’에 참석한 의문사와 관련된 유족들이 흐느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제24회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가 1988년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간 치러졌지만, 내게 올림픽에 대한 기억은 통째로 없다. 다만, 그해 국회가 달라졌다는 건 확실히 기억에 남는다. 국정감사가 부활했고,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가 열려서 관련자들이 국회에 불려 나갔다. 광주특위에서는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가 권력 장악을 위해 광주시민들을 학살했고, 그런 뒤에 계엄군에 맞섰던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갔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 분노를 샀다. 우리가 1980년대 내내 주장했던 것들이 사실로 확인되는 과정이었다.

그해 10월6일에 군 의문사 가족들이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에 들어갔고, 10월17일에는 전체 의문사 가족 농성으로 확대되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의문사 피해자들이 집단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농성장을 찾았다. 종로5가 기독교회관 3층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쓰고 있었다. 사무실로 쓰던 방 옆의 회의실에 책상과 의자를 밀어내고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아 놓고 있었다. 벽에는 “죽은 것도 억울한데 은폐조작 웬 말이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들은 “의문사 문제를 다루지 않은 5공특위는 정치적 기만”이라고 했다.

1989년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이소선 어머님(가운데). 전태일재단 제공

의문사 농성을 지원하다가

“일은 많은데 엄마들이 잘 모르니까, 래전이형이 좀 도와줘.” 유가협 회장이었던 이소선 어머님이 나를 반기며 말했다. 유가협에는 정식 활동가가 정미경 한 명뿐이었다. 거기에 택시해고노동자 박채영이 도움을 줬고, 의문사 사건 관련자들도 잠깐씩 들러 거들었다. 나를 가장 반긴 건 정미경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학교 후배였다.

초로의 엄마, 아빠들이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의문사를 알렸다. “의문사를 아시나요?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 몰라요. 군대에서, 경찰서에서, 동굴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시체로 돌아왔는데, 모두 자살이라고 해요.”

낮이면 유인물을 돌리고, 마이크를 잡느라 지친 그들은 농성장 바닥에 누워 밤 늦도록 아이들 얘기를 했다. “내 아들은요”로 시작되는 끝도 없는 얘기를 하다가 울었다. 그러다 그들이 잠들고 나면 여기저기서 헛소리가 들렸다. 아이들 이름을 부르고, 경찰과 싸우는지 욕을 하면서 이불을 걷어차는 잠꼬대였다. 그들에게 이불을 덮어주면서 연민의 정이 생겼다고나 할까, 나는 점점 농성장 파수꾼 중 한 명이 됐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이런 죽음 자체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우리사회에서 의문사 문제가 처음 정치적으로 부각된 것은 아마 1984년일 것이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강제징집돼 군에 끌려간 뒤 녹화사업으로 죽은 희생자 6명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거셌다. 녹화사업은 “대학생들 머리에 든 빨간 물을 파란 물로 바꾼다”는 뜻으로 작명되었다. 보안대는 이들에게 프락치 노릇을 강요하기도 했다. 휴가를 보내 그들이 속했던 조직의 동향을 관찰해 보고하도록 하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한때 학생운동권에선 휴가 나온 강제징집자들이 경계대상이 되기도 했다. 보안대 요구에 순응하지 않은 이들에게 돌아온 대가는 죽음이었다. 정성희(연세대, 1982년 7월23일 사망), 이윤성(성균관대, 1983년 5월4일 사망) 김두황(고려대, 1983년 6월18일 사망), 한영현(한양대, 1983년 7월2일 사망), 최온순(동국대, 1983년 8월14일 사망), 한희철(서울대, 1983년 12월11일 사망), 그들의 죽음 양상은 달랐지만 모두 사망 전 녹화사업을 당했다.

군대가 아니어도 의문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5공화국 당시 3대 의문사는 김성수, 신호수, 우종원 사건이었다. 서울대 1학년생 김성수는 1986년 6월, 전화 한 통을 받은 뒤 슬리퍼를 신고 자취방을 나섰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지 않아 누나가 실종신고를 했고, 그는 사흘 만에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허리춤에 돌을 세 개나 매단 익사체로. 신호수는 방위병 시절 모아두었던 북한 삐라 탓에 서울 서부경찰서에 연행돼 11시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가 행방불명됐다. 1주일 뒤 그의 고향인 여천 돌산의 동굴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됐다. 서울대생 우종원은 이른바 ‘깃발 사건’으로 수배 중에 경부선 영동-황간 구간 철로 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모두 자살로 처리된 사건들이다.

이 밖에도 육군 7사단 지오피(GOP∙일반 전초) 중대본부 유류고에서 휴가 하루 전 엠(M)16 소총으로 오른쪽과 왼쪽 가슴에 각각 한발씩을 쏴 관통했으나 죽지 않자 머리에 한 발을 더 쏴 자살했다는 허원근, 학생운동 중 군에 입대해 근무 중 총격에 의해 죽은 이이동, 학생운동을 하다 부모님 강요로 입대해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된 최우혁, 1987년 군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에 투표한다고 했다가 죽게 된 정연관, 카투샤 복무 중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다 죽은 김용권, 대우중공업에서 민주노조를 만들다 의문의 죽임을 당한 정경식, 경찰의 불심검문에 불응한 이유로 파출소로 끌려가서 폭행당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죽은 김상원, 경찰의 폭행으로 의식을 잃자 행려병자로 병원에 넘겨져 시신이 해부용 실습교재로 사용된 문영수, 군에서 시신에 멍과 칼자국이 있음에도 비관·음독자살로 몰린 박상구씨 사건들이 있었다. 이런 35명의 의문사 유가족들이 모여 농성을 벌이게 된 것이다.

나와 정미경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행사나 집회 등을 파악해 일정표를 짰다. 의문사 가족들은 가슴에 맺힌 게 많았다. 그들은 어디서고 분노를 폭발했다. 1988년 10월17일부터 그 다음해인 1989년 2월27일까지 벌인 135일간의 농성 중에 유가족들은 10명만 모여도 거리로 뛰어 들었고, 국회는 물론 재판정에서도 소란을 피우곤 했다. 그러다 정연관 어머니 임분이, 박선영 어머니 오영자씨는 구속돼 여덟달 동안 징역을 살기도 했다. 농성이 장기화된 데는 두 분 어머님의 구속이 결정적이었다.

“내 자식 죽인 놈들 제 명에 못 살리라”

농성 중에 나는 제대로 정리된 기록이 없다는 걸 알고 가족들을 인터뷰해 자료집을 만들었다. 유가족들은 청와대를 비롯해 관련기관에 보냈던 진정서와 현장 사진, 부검 사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내민 사진은 하나같이 피투성이였다. 끔찍하다고 해서 고개를 돌려선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매일 억울한 사연들을 들었고, 그들이 건네준 사진을 보아야 했다.

의문사 자료집 ‘내 자식 죽인 놈들 제 명에 못 살리라’. 필자 제공

군에선 주로 총기 사망자가 많다. 총상 사진은 어느 것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게 없었다. 허원근 아버지 허영춘 씨는 뇌수가 터져 나온 현장 사진을 들이밀면서, “이거 똑바로 봐라. 이게 말이 되냐”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자꾸 들여다보니 하나하나 이해가 됐다. 다른 사건들도 그랬다.

유가족의 이야기와 자료들을 정리해서 글을 썼다. 전동타자기가 필요했는데 유가협엔 없었다. 옆 방에 있는 인권위원회 걸 빌려 써야 할 상황이었다. 인권위원회 직원들이 퇴근한 밤에 타자기를 사용한 뒤 그들의 출근 전에 갖다놓기를 반복했다. 편집할 방법을 몰라 하나하나 가위로 오려 붙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료집이 ‘내 자식 죽인 놈들 제 명에 못 살리라’였다. 내가 만든 첫번째 의문사 자료집이었다. 표지는 이글거리는 눈빛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들어서 안고 있는 판화를 골랐다. 그 판화를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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