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국내성 6천개 피라미드 여행, 감동의 물결[함영훈의 멋·맛·쉼]

2024. 7. 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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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고구려 패키지 통해서도 일반 공개

[헤럴드경제(집안)=함영훈 기자] 만주, 요하, 연해주 등 우리의 광대한 영토는 7세기 이후 많이 줄어들었고, 19세기 후반까지도 우리땅이었던 간도, 연해주 일대 고토 조차 나라 힘이 가장 약할때 완전히 빼앗기다보니, 남한 내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고증할 길은 막막하다.

하지만 지금도 서간도, 송화강, 북간도, 동간도 일대에는 고구려의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만 중국측의 고의적인 방치와 훼손, 한국 역사라는 점을 지우려는 의도가 유적 곳곳에 남아있다.

▶고구려 초기 환도와 피라미드= 신의주 건너편 단동과 백두산 북서쪽 통화 사이에 있는 집안에 가면 매우 놀라운 유적이 한국 일반 여행객을 맞기 시작했다. 여행사들의 백두산 탐방 패키지로도 갈 수 있다. 바로 6000여기의 고구려 피라미드이다.

국내성이 있던 집안 고구려유적의 피라미드 고분군. 환도산성 주변으로 불과 50년전만 해도 1만2000여기가 있었고, 현재 6000여기가 형체를 알아볼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광개토왕릉, 광개토비, 장수왕릉, 국내성터 등 많은 유적이 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환도산성 주변 수많은 피라미드들이다.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있는 것은 1만2000개, 그럴듯한 피라미드의 모양새나 4각 밑변 정도는 남아있는 것이 6000여개라고 현지 가이드는 말한다.

고구려의 시조 황제인 고주몽성제는 BC 37년 비류수가 흐르는 졸본에 터잡았고, 2대 황제인 유리명제는 부왕의 집권으로부터 35년 뒤인 AD 2년 집안 국내성 도성(황성이라 부름)과 환도산성을 조성했다. 그후 이곳은 424년 간 고구려의 수도로서 역할 한다.

졸본 지역의 비류수
고구려 유적 집안에 여행붐이 일고 있음을 보여주는 초대형 광고판

집안 고구려 유적지 주차장부터 ‘조선여행’이라는 초대형 광고판이 손님 모객을 위해 서있다.

어느때인가부터 동간도-북간도(연길,도문,백두산북쪽), 서간도(단동,집안,통화,백두산 서쪽) 탐방후 백두산에 등정하는 손님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재중동포들이 대대적인 마케팅에 나선 것이다.

고구려유적 숙식 인프라

이곳의 방문객은 70% 이상이 남한사람들이다. 찬음 민박 등 유적지 바로 옆에 숙박시설도 보이고 그 앞엔 아이스크림, 냉맥주, 중국에서 접하기 어려운 커피도 있다.

광개토왕의 본딧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줄임말인 호태왕 기념품 가게도 보인다.

호태왕은 중국 정부가 쓰는 말인데, 우리 한민족의 국토를 광대하게 개척했다는 의미를 덮으려 쓴다. 남한 식의 세련되 의상실도 있어 눈길을 끈다.

고구려 유적 탐방객의 70%이상이 남한 사람들이다.

▶광개토왕릉비= 유네스크 세계유산이라는 뜻의 AAAAA 표시와 함께 유적입구가 나온다. ‘고구려 문물 고적 여유 풍경구’이다.

여행은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릉, 장수왕릉, 환도산성 순으로 이어진다.

도성인 국내성은 집안시 중심부에 있으나 일제때까지만해도 10m에 육박하던 성벽은 현재 2~3m만 남아있고, 석벽을 건축자재로 쓴 아파트와 주택가들이 덩그러니 얹혀져 있다.

안타까운 도성벽

장개석이 이끄는 중화민국 시대까지만 해도 보존을 잘하다가 중국 공산당 집권이후 방치, 훼손, 역사 폄훼가 심했던 것이다.

광개토왕비(중국은 호태왕비라고 표기) 한글 안내판엔 ‘기원(후) 414년에 세워진 묘비는 호태왕의 아들인 고구려 제20대왕 장수왕이 부친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묘비는 각력응화암으로 만들어졌고, 방추형으로 되어있다. 높이는 6.39m이고, 너비는 1.34~3m이다. 비석의 벽에는 한자 예서체로 된 비문이 있는데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그 중 확인된 한자가 1590여자이다. 비문에는 고구려 건국 신화, 초기 왕계, 호태왕의 영토개척 공적, 능묘의 관리제도 등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기존 역사가 가장 유구하고 문자 기록이 가장 많은 고구려 시기 고고학 자료이다. 광개토왕릉비의 발굴은 중세기 이래 세인에게 잊혀졌던 고구려 문명 및 중심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확인하였고, 동북아 지역 고고학 유적지 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인증하였다.’고 적어놓았다.

광개토왕릉비

문자기록이 가장 많다는데, 식민사학자를 포함한 강단사학계는 이를 알고도 우리 역사를 한반도로 축소하려는 중국 공산당과 한국내 식민사학계를 키운 일본 우익의 놀음에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이 통탄스럽다.

주황색 지붕의 전각 안에 유리막으로 가려진 광개토왕릉비는 전각 안에서 촬영하지는 못하고 들어가기만 한다. 그래서 반사가 심한 유리막 밖에서 안에 있는 사람의 인증샷을 깨끗하게 찍기 위해 많은 한국인들이 잠깐의 연구개발을 하더니 A4용지 윗가리개 촬영기법을 쓰고 있었다.

어머니의 젖가슴 처럼 생긴 광개왕릉 꼭대기 석실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1600년만에 부조금을 잔뜩 놓아두었다.

광개토왕 영전에 올리는 1400년만의 부의금
광개토왕릉

▶장수왕릉 피라미드와 환도성 수천개 피라미드 고분군= 장수왕릉은 이집트 카이로 사카라의 계단형 피라미드와 흡사하다.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와도 닮았다. 장수왕릉 피라미드에는 일제가 도굴 또는 훼손 목적으로 돌사이를 벌린 흔적이 곳곳에 있다.

413-490년 사이에 축조된 고구려의 대표적인 적석묘로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이다. 집안의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웅장한 형태의 능으로 집안시 북쪽 5km 떨어진 통구 고분군에 있다. 고구려의 비약을 상징하므로 '동방의 금자탑' 혹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장수왕 피라미드
장수왕의 후궁 무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근 환도산성 아래 수천기의 피라미드이다. 여행자 방문이 허용되는 환도산성 초입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아도 평지에 수백기를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다. 이런 피라미드 고분군은 성 주변 사방에 널려 있다.

집안 시내에 있는 국내성은 거대한 도성이고, 환도성은 유사시 황제가 근무하는 산성이다.

환도성 피라미드 고분군
평지의 국내성 궁성 외에 환도산성에도 고구려 황제의 집무 공간이 있었다.
한민족 피라미드 고분군을 보고난뒤 감격에 젖은 한 젊은 여행객이 춤을 추고 있다.

성 동쪽 6㎞ 지점에는 용산(龍山), 북쪽 1㎞ 지점에는 우산(禹山), 서쪽으로 1.5㎞를 가면 칠성산(七星山)이 있어 뒷면과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남쪽에는 압록강이 흘러 배산임수의 천연요새이다.

▶훼손, 방치 더는 없어야= 평지의 도성인 국내성의 성벽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9m 였다. 그리고 환도성 피라미드 고분군은 1960년대만 해도 1만 2000여기에 달했으나,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6000여기만 존재한다.

환도성 피라미드 고분군의 주인도 속속 가려지고 있다. 왕와 왕비, 귀족들이다. 장수왕릉 급이거나 약간 적은 피라미드 고분들.

집안시내에 있는 무덤들 전체를 묶어 통구고분군이라 통칭하고 있다. 통구는 동이구족의 줄임말이다. 고분군은 우산하고분군, 산성하고분군, 만보정고분군, 마선고분군, 칠성산고분군으로 나누어진다. 일반인들의 접근이 쉬운곳이 바로 우산하 고분군이다.

피라미드 우산하 고분군 속에는 왕릉으로 확인된 우산 2110호와 992호, 임강총이 이에 속해 있다. 아울러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 사신무덤, 무용총, 각저총, 오회분과 사회분등이 있다. 제대로 된 보존과 발굴이 이어졌다면 수많은 피라미드의 주인이 가려졌을 것이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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