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경색 극복 ‘국민 감독’ 김인식 “11번째 한일전, 부끄럼 없는 한판으로”[이헌재의 인생홈런]

이헌재 기자 2024. 7. 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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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전 한국 야구 대표팀 감독이 지난 달 서울 잠실구장에서 한화 투수 문동주의 인사를 받고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국민 감독’이라 불리는 김인식 감독(77)은 한화 사령탑이던 2004년 12월초 대전에서 열린 제자 김해님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튿날에는 청주에서 열린 마정길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결혼식 뷔페에서 음식을 가지고 가는데 걸음걸이가 어색했다. 오른손이 잘 움직이지 않아 팬들의 사인요청에도 제대로 응할 수 없었다. 곧바로 서울로 올라온 김 감독은 병원을 찾았다. 검진 결과는 뇌경색이었다.

평생 운동을 하면서 살아왔고, 선수 은퇴 후에도 줄곧 그라운드를 지켰던 김 감독으로선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오랫동안 몸을 함부로 하긴 했다. 사람 좋고, 친구 좋아하는 김 감독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아마야구 선수 시절 크라운맥주에 몸담기도 했던 그 역시 술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손에는 항상 담배가 들려 있었다. 하루 2, 3갑이 기본이었다. 여기에 오랫동안 승부의 세계에서 살면서 쌓인 스트레스가 결정타가 됐다.

김인식 감독이 한화 사령탑 시절 애제자 류현진과 재미있는 포즈를 취했다. 동아일보 DB

김 감독이 뇌경색을 겪은 지 올해로 정확히 20년이 됐다. 발병 당시 50대 후반이던 그도 어느덧 70대 후반의 나이다. 하지만 약간의 후유증이 있을 뿐 그는 여전히 건강한 노년의 삶을 살고 있다.

지난달 서울 잠실구장내 일구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 감독은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기자를 맞았다. 안색은 좋았고, 목소리는 힘이 넘쳤고, 발음 역시 또박또박했다. 여전히 오른발을 가볍게 절었지만 걷는 것도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모처럼 야구장을 찾은 그에게 여러 사람이 인사를 하러 왔다. 두산 시절 제자이던 김경문 한화 감독과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 등이 그를 찾았다. 신예 투수 문동주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김 감독은 반갑게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눴다. 김 감독은 “올초에 발가락 골절로 고생을 좀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 나았고,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몸이 가볍다”고 했다.

김인식 감독이 2017년 제3회 WBC 때 해설위원을 맡은 박찬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DB

김 감독은 뇌경색을 극복한 대표적 모범사례로 꼽힌다. 실제로 그가 ‘국민 감독’의 명성을 얻은 것도 2005년 이후 국제대회 성적을 통해서였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감독을 맡은 그는 한국 대표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2009년 제2회 WBC에서는 우승 문턱까지 갔다가 준우승을 했다. 그리고 2015년 신설된 프리미어12에서는 마침내 일본을 꺾고 세계 최정상에 올랐다.

대회 때마다 오른 다리를 절뚝이며 그라운드 위를 오가던 김 감독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그는 뇌경색을 겪은 뒤에도 잘 회복하면 얼마든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꾸준한 관리로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김 감독은 모처럼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니폼을 입는다. 22일 일본 삿포로 에스콘 필드에서 열리는 한일드림플레이어스 게임이 그 무대다.

이 대회는 한국과 일본 야구 레전드 선수들이 출전하는 이벤트 대회다. 김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지휘하고, 일본 대표팀은 하라 다쓰노리 전 요미우리 감독이 맡는다. 두 감독은 2009년 제2회 WBC 때 한국과 일본의 사령탑이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 5차례 맞붙어 3번을 이기고도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패 중 한 번이 결승전이었기 때문이다.

2015년 제1회 프림어12에서 우승한 김인식 감독이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고 있다. 동아일보 DB

출전 선수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한국에선 ‘바람의 아들’ 이종범을 비롯해 ‘일본 킬러’로 유명했던 구대성, 전 메이저리거 서재응과 봉중근 등 제1, 2회 WBC 대표팀 소속이었던 선수들이 대거 나선다. 일본 대표팀에선 MLB에서 뛰었고 WBC에도 출전했던 우에하라 고지, 이와쿠마 히사시, 조지마 겐지, 후쿠도메 고스케 등 한국 팬들에게도 익숙한 선수들이 대거 나선다.

비록 이벤트 경기지만 한국 대표팀은 물론 김 감독에게도 중요한 일전이다. 김 감독은 2006년 WBC부터 2015년 프리미어12까지 한일전에서 정확히 5승 5패를 거뒀다. 11번째의 한일전을 맞는 그는 “무엇보다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2009년 WBC 결승전 패배는 여전히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한국은 연장 10회 임창용이 이치로 스즈키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아 패했다. 김 감독은 “한동안 그 장면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결국 내가 잘못한 거다. 누구나 알듯이 이치로를 걸러야 할 상황이었는데 내가 배터리에게 좀 더 확실하게 사인을 주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고 했다.

김인식 감독과 김응용 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이 함께 찍은 기념 사진. 동아일보 DB

반대로 2015년 프리미어12 결승전에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우승을 했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일본 선발 투수로 나선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에게 경기 종반까지 철저히 막혔다. 하지만 오타니가 내려가자마자 후속 투수를 공략해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김 감독은 “그렇게 이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야구도, 인생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은 경기였다”고 했다. 그는 또 “살아보니까 그렇다. 모든 게 잘 되는 것 같다가도 한 번에 엎어질 수 있다. 반대로 전혀 희망이 없는 것 같지만 엎을 수도 있다. 인생이 그래서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것”이라고 했다.

김 감독 역시 처음 병마와 싸울 때는 절망적인 느낌에 빠지기도 했다. 손가락 하나, 발 한 번 움직이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침에 두 시간, 점심 식사 두 시간, 저녁 두 시간 등 하루에 여섯 시간씩 운동을 했다. 그는 “남들이 볼 때는 뭘 하나 싶을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내게는 너무 힘든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모두 이겨 내고 한 달 만에 팀 스프링캠프에 참가해 선수들을 지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김인식 감독이 2004년 뇌경색 발병 직후 재활을 하고 있다. 그는 고통스런 재활을 견뎌내고 다시 야구장을 돌아왔다. 동아일보 DB

그는 요즘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틈이 날 때마다 많이 걸으려 노력한다. 병원도 다니면서 재활 운동도 열심히 한다. 뇌경색에 좋다는 약도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은 이제는 어떤 자리에 가든 한 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 소주든, 맥주든 주종을 가리지 않고 자리가 끝날 때까지 딱 한 잔으로 버틴다. 담배는 뇌경색 발병 후 20년 넘게 한 번도 손에 대지 않았다. 그는 “운동도 열심히 했지만 운도 좋았던 것 같다. 같이 재활을 하던 분들 중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분들도 있다”며 “하지만 어떤 경우든 포기하지 않고 ‘하면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김 감독은 현재 현장에선 떠나 있지만 야구의 끈은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2011년부터 한 스포츠 일간지에 자신의 이름을 단 야구 칼럼을 14년째 연재하고 있다. 부끄럽지 않은 내용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TV를 통해 모든 경기를 놓치지 않고 보려 한다. 애제자인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뛸 당시에는 새벽에 메이저리그 경기도 놓치지 않고 시청했다.

김인식 감독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그는 22일 한일드림플레이어즈게임에서 모처럼 유니폼을 입는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그는 한국프로야구 발전을 위해서는 더 좋은 투수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조언했다. 투수 출신인 그는 “한국 야구가 시설과 규모에서 예전이랑은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할 것은 맞다. 다만 예전만큼 좋은 투수들이 나왔는지는 의문”이라며 “요즘엔 시속 150km를 넘게 던지는 투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선동열, 최동원, 박철순, 송진우, 구대성처럼 원하는 곳에 자기 공을 던지는 투수가 몇 명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또 야구가 좀 더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그는 “요즘 투수들은 대개 4, 5개의 변화구를 던진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구종을 던지느냐 보다는 공의 질이 더 중요하다”며 “전성기 박찬호, 임창용, 김광현 등은 몇 개 되지 않은 구종으로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단순하지만 질이 좋은 공을 던지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좋은 투수들이 많이 나와야 타자들도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해온 야구가 지금도 여전히 너무 좋다”며 “앞으로도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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