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권력자가 좋아하니 이걸 만들어라! 특명으로 탄생한 그 술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7. 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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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⑮] 타이완 난터우 편 - 장제스가 사랑한 '푸리샤오싱주'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긴 통로를 황주 술독으로 장식해 놓은 푸리술공장(埔里酒廠)


오늘날 대만은 다민족 국가를 표방한다. 대만 행정원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말 대만 인구는 2,326만 명이었다. 그중 95.4%가 한족이었고, 2.5%는 원주민이며 1.1%가 새 이민이었다.

원주민은 한족이 대륙에서 건너오기 이전에 이미 대만에 정착해서 살아온 사람을 가리킨다. 혈통적으로는 폴리네시아계이고, 말레이-인도네시아계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문자를 사용하지 않아서 정확히 언제부터 대만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대만에서 공인된 원주민의 부족은 16갈래이고, 인구는 58여만 명이다.

대만 원주민은 이런 배를 타고 대만으로 왔다.


중국 역대 왕조는 대만에 관한 관심이 아주 적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가 식민지로 삼았을 때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치하였다.

1624년 네덜란드는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해서 원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부족마다 언어와 문화, 생활 양식에서 차이가 있고, 때로는 서로 싸우고 때로는 단합하는 걸 알았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할양받은 일본은 원주민을 크게 산지에 사는 고산족(高山族)과 평지에 사는 평포족(平埔族)으로 나누었다. 이를 다시 9갈래의 부족으로 구분하였다.

고산족을 대표하는 프유마족(卑南族, Puyuma)의 전통 가옥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대만을 돌려받은 국민당 정부는 이런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하지만 1998년 대만 정부는 원주민위원회를 설치해서 다시 정밀한 조사에 들어갔다.

그에 따라 기존 부족에 포함됐거나 한족에 동화됐던 평포족 계열을 발굴하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14년에 원주민은 16갈래로 늘어나게 됐던 것이다.

현재 원주민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부족은 아미(阿美, Amis)족이다. 주민 수가 21만 8천여 명에 달한다. 거주 지역은 대만 동부의 화롄(花蓮), 타이둥(臺東) 등에 걸쳐 있다.

타얄족은 직포 장인들이 많아 의상이 화려하였다.


그 다음은 파이완(排灣, Paiwan)족이다. 10만 명이 조금 넘고, 대만 남부의 핑둥(屏東)과 타이둥에 산다. 세 번째로 많은 부족은 타얄(泰雅, Atayal)족이다. 9만여 명으로, 북부 산간지역에 퍼져서 산다.

그렇기에 외국인이 대만을 여행하면서 원주민을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의 문화와 풍습을 체험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난터우(南投)현에 있는 구족문화촌에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구족문화촌은 1979년 원주민의 전통문화가 사라져가는 걸 안타깝게 여긴 한 사업가가 거금을 쾌척하면서 시작되었다.

파이완족의 전통 결혼식을 묘사한 모습


대만과 일본의 전문가가 관련 자료를 제공하여 1983년에 시공하여 1986년에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원주민이 9갈래만 인정되어 구족문화촌으로 명명되었다.

나는 2024년 1월에 방문하였다. 뜻밖에도 입구부터 테마파크의 느낌이 강하였다. 다양한 놀이시설이 갖추어졌고, 거대한 유럽식 성과 정원이 조성되었다. 원주민지구는 거주지가 옛 모습대로 복원되고 밀랍인형을 배치하여 생활상을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민속촌보다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방문객의 절대다수는 단체로 놀러 온 학생들이었다.

쩌우(鄒, Tsou)족의 가정 내부를 복원한 모습


원주민의 역사를 좀더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일 만하였다. 1683년 정성공이 세운 왕국을 무너뜨린 청조는 한족의 대만 이주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한족의 불법 이주는 청나라 시기 줄곧 판쳤다. 당시 대만으로 건너온 한족은 원주민과 통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았다. 하지만 일본이 식민통치를 시작한 뒤부터는 원주민에 대한 동화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였다.

일본은 황민화 정책을 앞세워 원주민이 사용하는 고유 언어를 금지하였다. 그 뒤 대륙에서 건너와 대만을 통치하였던 국민당 정부도 다를 바 없었다.

구족문화촌의 중앙광장에서는 하루 2차례 원주민의 공연이 열린다.


특히 사회 비주류의 길을 걸었던 고산족보다는 평지에 살았던 평포족에 대한 동화 정책이 강압적이었다. 그로 따라 과거 24개에 달하였던 원주민의 언어 중에 10개 이상이 사라져 버렸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계엄령 기간 철권통치가 가해져서, 원주민은 감히 반항하지 못하였다. 원주민이 권리 찾기와 언어 보존에 나선 것은 1980년대 말부터다.

오랜 세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기에 원주민은 스포츠계나 연예계로 많이 진출하였다. 스포츠계에서는 양촨광(楊傳廣)이 1960년 로마 올릭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오늘날에도 원주민의 생김새는 한족과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연예계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여가수 장후이메이(張惠妹)가 있다. 구족문화촌이 문을 열어 공연하거나 일하는 원주민을 모집했을 때 경쟁률이 치열하였다. 보수가 다른 직업보다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2016년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원주민 문화를 말살했던 행위에 대해서 사과하고 8월 1일을 원주민의 날로 지정하였다.

이는 대만 역사상 원주민 탄압에 대한 첫 공식적인 사과이었다. 차이 총통은 푸젠(福建)성에서 건너온 객가(客家)의 후예이자, 파이완족의 혈통도 섞여 있다.

르위에탄 문무묘에서 관우를 향해 제를 올리는 대만인 일가족


이렇듯 구족문화촌은 대만인의 한 축인 원주민의 전통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구족문화촌과 인접한 르위에탄(日月潭)은 전체 면적이 7,930㎡에 달하는 대만 최대의 호수이자 해발 736m에 있다.

호수변에는 대만에서 가장 큰 문무묘도 있다. 문무묘는 중화권에서 성인으로 추앙하는 공자나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이처럼 난터우현에는 전통문화와 관련된 볼거리가 많은데, 무엇보다 푸리술공장(埔里酒廠)을 빼놓을 수 없다. 푸리술공장은 대만에서 유일하게 황주(黃酒)를 특화해서 제조하기 때문이다.

푸리술공장은 난터우현을 찾는 관광객의 필수 코스다.


황주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춘추시대 말기 월의 구천이 오의 부차에게 복수하려 출정하기 전 병사들에게 한 사발씩 마시게 했다는 술이다.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다. 그렇기에 포도주, 맥주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 손꼽힌다. 황주는 쌀을 쪄서 식힌 다음 보리누룩을 섞어 발효하여 빚는다.

색깔은 짙은 황색이고 알코올 도수는 15~20도에 불과하다. 맛이 진하면서 부드럽고 가격이 싸서, 중국에서는 서민들이 즐겨 마셨다. 또한 요리 맛을 내는 조미료로 쓰인다.

푸리술공장의 전시실 곳곳은 황주 술독으로 장식하였다.


푸리술공장은 1917년에 현지 주민이 고장의 물이 좋은 점에 착안하여 술도가를 연 것이 시초다. 당시 대만을 지배하던 일본과 일본인에게 판매하기 위해서 세이슈(清酒)를 중심으로 빚었다.

게다가 대만 전통의 양조술이 접목하면서 술맛이 명성을 얻었다. 그로 인해 대만총독부가 황실에 진상되는 공주(貢酒)로 지정하였다.

그런데 1949년 제조하는 술 품종이 바뀌었다. 국민당 정부가 푸리술공장으로 하여금 황주를 빚도록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샤오싱주(紹興酒)를 지정하였다. 이는 시대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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