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미·중·러, 한국 외교의 ‘삼체’ 문제

파리/정철환 특파원 2024. 7. 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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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 사이의 포괄적인 전락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이 조인됐다"라면서 "김정은 동지께서 푸틴 동지와 함께 조약에 서명했다"라고 보도했다. /노동신문 뉴스1

당연히 나올 비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나 딱 예상했던 내용으로 나오니 서글플 정도다. 러시아와 북한의 조약 체결 이후 쏟아지는 ‘윤석열 외교 실패론’ 얘기다. 이번 정부가 북한을 버리고 일본과 굴욕적 화친을 하더니 대(對)러 제재에 쓸데없이 참여하고 포탄까지 우회 지원해 러·북이 밀착할 빌미를 줬다고 한다. “한국 외교 사상 최악의 실패”란 표현도 봤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어지간히 윤 대통령이 싫긴 싫었구나라는 생각은 들었다.

‘윤석열 외교’에 대한 비판을 부정·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비판론자들이 제시하는 국제 정세의 해석 틀 내에서 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외교의 게임이 벌어지는 판은 소셜미디어의 분석가들 생각보다 훨씬 다차원적이다. 천체물리학의 ‘삼체(三體) 문제’보다도 난해한 게 국제 정치다. 행위자(국가)의 힘과 영향력이 시시각각 변하고, 그 내부 역학마저 큰 변인이 되며, 지정학이 만들어 놓은 ‘구조’의 문제까지 가중된다.

수많은 ‘만약에’ 중에, 북한을 끌어안고 우크라이나를 나 몰라라 했다면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설사 그랬더라도 우크라전이 장기화에 돌입한 순간 러·북 밀월은 예정됐다는 것이 유럽 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러시아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대량의 탄약을 갖고 있고 또 줄 수 있는 나라는 북한뿐이란 ‘팩트’가 결정적이다. 남북 관계, 한·러 관계가 아무리 좋았더라도 러시아가 탄약이 절실한 이상 막기 힘든 일이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군사 동맹 복원까지는 안 갔을 것’이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안보 환경’에 있다고 주장하는 북한이 비축 탄약 중 상당량, 그것도 자국 포병의 주력인 152㎜ 포와 방사포(다연장로켓시스템) 탄약까지 대거 내주는 것은 큰 모험이다. 북한 군부는 당연히 이로 인한 리스크를 ‘러시아가 책임지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지체 없는 군사 원조’를 명기한 구(舊)조약의 복원은 러시아의 예상된 응답이었다. 핵개발마저 ‘불가피했다’며 북한 정권의 안보 불안을 이해해 온 이들이라면 쉽게 납득하리라 생각한다.

현 정부의 외교가 ‘A학점’을 받기엔 부족할 수 있다. 다만 기존 국제 질서를 유지·확대하려는 미국·유럽과 이를 깨부수고 새 질서를 세우려는 중·러의 대결이 본격화한 지금, 윤석열 외교 비판론자의 문제의식은 초점이 다소 빗나간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다. 한국의 당면 문제는 더 이상 ‘양 진영 사이에서 어떻게 실리를 취할까’가 아닌, ‘어느 편과 계속 손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나’일 수 있어서다. 탈(脫)냉전기에 한국이 누렸던 ‘체리 피커’의 지위는 유효기간이 다해가고 있다. 미국도 유럽도 중국도 러시아도, 그걸 더는 용인해 줄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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