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심 “꼰대 연극? 이토록 무례하고 엉망인 정치에 경종 울리고 싶었다”

김윤덕 기자 2024. 7. 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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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악극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열연하는 ‘국민 엄마’ 고두심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린 음악극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에 출연하는 고두심을 지난 6월 25일 만났다. 이순재, 이정길, 임동진 등 베테랑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이 작품에서 윤옥 역으로 열연하는 고두심은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우리 역사"라고 했다. 7월7일까지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김지호 기자

고두심을 처음 만난 건 13년 전이다. 예순의 그녀가 스윙, 탱고, 차차차를 추는 댄서로 연극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됐었다. ‘국민 엄마’로 추앙받지만 마음을 쉽게 여는 타입은 아니었다. 인사동 밥집에 마주 앉아 솥밥을 박박 긁어 먹고 나서야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낯을 가리지만 한번 친해지면 오래 갔다. 지난 27일 성남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7월 7일까지)는 표재순 연출과의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만든 음악극이다. 이순재, 이정길, 임동진, 기정수 등 베테랑들이 총출동한다. 6·25라서 더 각별했다고 한다. “잊혀선 안 되는 역사니까요. 정치가 이토록 무례하고 엉망인 시대에 경종을 울려야 해요.”

개막 이틀 전 연습실에서 만난 고두심은 20대 배우들과 함께 무대를 펄펄 날아다녔다.

◇ 누가 이 역사를 모르시나요?

-8년 만의 연극 무대다. 왜 이 작품인가?

“6·25라서. 대본을 받고 ‘아아, 잊으랴’로 시작하는 ‘6·25의 노래’를 불러봤다. 하나도 안 까먹었더라(웃음).”

-올드한 주제 아닌가.

“전쟁 후 70년도 더 지났지만 남북은 여전히 대치 중이다. 지난 역사는 잊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만 가지고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늘 안타까웠다. 나라는 시끄럽고 정치엔 희망이 없으니 탄식이 절로 난다.”

-젊은 층을 매료시키기엔 어려운 작품이다.

“그들에겐 ‘라떼’, ‘꼰대’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쯤 귀 기울여줬으면 좋겠다. 젊은 세대에도 익숙한 그 시대 트로트 명곡들이 쏟아져나와 지루할 틈이 없다(웃음).”

-표재순 연출과 인연이 깊다던데.

“굴렁쇠 어린이가 등장했던 88올림픽 개막식을 총연출한 분이다. 극작가 신봉승과 콤비를 이뤄 MBC 사극을 히트시킨 당대의 스타 PD인데, 새 작품 하실 때마다 고두심과 김영란을 꼭 부르셨다(웃음).”

-이순재, 이정길, 임동진 등 베테랑들이 함께 출연하더라.

“표 선생님의 방대한 인맥이다. 88세 거장이 ‘모여라!’ 하니 바빠도 ‘꼼짝 마!’ 하고 달려와야지(웃음). 6·25라 더 의기투합했다. 선생의 유작이 될 수도 있으니 다들 시간을 쪼개서 연습했다.”

성남아트센터에서 7월 7일까지 공연하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고 목사로 열연하는 명강사 김창옥은 극에 유쾌한 웃음과 활력을 불어넣는다. /컬처플러스 제공

◇ ‘전선야곡’에서 ‘럭키 서울’까지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기구한 인생을 사는 여인 ‘윤옥’ 역이다.

“전쟁으로 사랑했던 남자와 아들을 모두 잃는 여인이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을 살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삶의 파도와 맞서 싸운다. 어디 윤옥이뿐일까. 저마다 아픔과 수치심을 감추고 삭이면서 한 생을 살아낸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 이야기다.”

-제주에서 태어나 6·25에 대한 기억은 없을 텐데.

“부산만큼 제주에도 피란민이 많았다더라. 초가집 됫박만 한 방에 일고여덟 명이 함께 살았단다. 제주는 이미 4·3의 상처가 깊고, 돌멩이 밭 일궈 먹고살아야 했던 척박한 환경이었다. ‘호근 살아제니’라는 제주말처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다들 이를 악물었다.”

-해설자로 번갈아 출연하는 이순재와 이정길은 연극 도입부와 중간, 마지막에 감초로 등장해 웃음을 준다.

“이순재 선생은 6·25 때 열다섯 살이어서 지금도 생생하게 전쟁을 기억하고 계신다.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이맘때만 되면 가슴 한쪽이 아파온다고 하시더라. 그래선지 해설도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정길 선배는 이순재 선생보단 아랫세대라 잘 들어보면 대사가 조금 다르다. 또 다른 묘미가 있다.”

-명강사 김창옥도 출연하더라.

“워낙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사람이라, 한없이 슬프고 무거워질 수 있는 이번 연극에 생기와 웃음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그가 성악 전공한 걸 알고 있나? 노래도 기똥차게 잘한다.”

-’전선야곡’을 비롯해 ‘단장의 미아리고개’, ‘굳세어라 금순아’, ‘닐리리 맘보’, ‘럭키 서울’ 등 흘러간 명곡 듣는 재미가 일품이다.

“‘오빠 생각’ 같은 동요까지 20곡 가까이 노래를 부른다. 그중에서도 ‘전선야곡’은 압권이다. 포탄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젊은 군인들이 ‘전선야곡’을 부르며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는 장면은 정말 슬프다. ‘정안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라는 대목에선, 연습인데도 맨날 운다.”

-TV조선 ‘미스트롯3′에 출연했던 가수들도 출연한다더라.

“홀로 된 윤옥이가 밥벌이를 위해 카바레에서 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스김, 정슬, 염유리 등 ‘미스트롯3′에서 사랑받은 젊은 가수들이 카바레 신입 가수 역으로 깜짝 출연해 노래한다. 이래저래 볼거리가 많은 무대다(웃음).”

표재순 연출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에는 고두심뿐 아니라 이순재, 이정길, 임동진, 기정수 등 베테랑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사진은 연극이 끝난 뒤 무대인사를 하는 모습. 7월 7일까지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컬처플러스

◇ 작품? 감독의 인간성 보고 고른다

-칠십 대로 접어들었는데도 드라마, 영화, 연극까지 섭렵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올까.

“앞만 보고 달리는 무식함?(웃음) 3일만 집에 있으면 온몸이 쑤신다. 우울증이니 오십견이니 하는 걸 나는 겪어본 적이 없다.”

-쉬고 놀면서 재충전도 하셔야지.

“옛날에 곽지균 감독이 거미 똥구멍에서 거미줄 나오듯 어쩌면 일을 그렇게 매일 하냐고 묻던데 난 그게 된다. 촬영장에서 놀고, 무대에서 쉬고, 모든 걸 여기서 다 한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있나?

“난 작품 볼 줄 모른다. 작품을 만드는 감독의 인간성을 보고 결정한다(웃음).”

-엄청 까다로우실 것 같은데.

“하나도 안 까다롭다. 그저 한 작품 하려면 6개월을 매일 그 감독을 보며 지내야 하는데 성질 나쁜 사람을 어떻게 견디나.”

-영화 ‘빛나는 순간’으로는 아시아 필름 페스티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33세 연하인 배우 지현우와의 파격 멜로여서 ‘출연료를 반납하고 싶다’고도 했던데.

“소원 성취했지, 하하! 근데 류승범 같은 배우를 기대했다가 작대기같이 키만 큰 지현우가 와서 처음엔 걱정했다. 근데 호흡을 맞춰 볼수록 사람이 말도 없는 게 남자다움이 막 나오더라. 문소리가 엄청 탐낸 배역이란 얘기도 들었다(웃음).”

-그러고 보니 ‘해녀’ 역을 많이 하셨다. 영화 ‘인어공주’, ‘빛나는 순간’을 비롯해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까지.

“제주 출신이니 해녀들 근성이랄지 정신은 누구보다 잘 표현할 수 있다. 근데 정작 물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해서 연기할 땐 애를 먹는다. 엄마가 해녀가 아니었고, 어릴 때 친구들과 바다에 놀러 갔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어서 물을 정말 무서워한다. 바다에 들어가면 누가 밑에서 막 잡아당기는 것 같다(웃음).”

-노희경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선 완벽한 제주말로 해녀 상군을 열연했다.

“김혜자 언니가 제주말이 너무 어려우니까 ‘차라리 영어가 낫겠다’고 했을 정도다(웃음). 배우들이 정말 열심히 했다. 이병헌은 틈날 때마다 나한테 달려와서 제주말 지도를 받았다. 생선 장수 역 이정은은 촬영 몇 달 전부터 제주에 집을 구해 살면서 동네 할머니들한테 제주말을 배우고 칼로 생선 내리치는 연습까지 완벽하게 했더라. 훌륭한 후배들이다.”

2024년 6월 25일 서울 구기동 이북5도청에 마련된 연습실에서 배우들과 연기하고 있는 고두심. 그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연습을 실전처럼 한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 ‘억척 어멈’은 이제 그만?

-새벽마다 등산하는 건 여전하신가?

“나이 드니 의사 선생님이 등산은 하지 말래서 새벽 6시부터 1시간씩 걷는다.”

-그래서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한가 보다.

“뒤태는 40대로 보인다더라, 하하!”

-그 많은 대사는 어떻게 다 외우시나.

“전체 맥락과 그때그때 상황을 이해하면 어렵지 않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나는 연습이 곧 실전이다. 이런 열의로 공부했으면 판검사 됐지.”

-연극이 영화·드라마보다 어렵지 않나.

“대사도 몸짓도 한 치의 오차가 있어선 안 되니 말도 못하게 신경이 쓰이지. 관객들 눈알이 도르르 굴러가는 것까지 다 보인다. 그만큼 희열도 크다. 오롯이 배우의 힘으로 가야 하는 예술! 연극쟁이들이 배가 고파도 이걸 놓지 않는 이유를 알겠더라.”

-뽀글 머리에 맷집 연기가 주특기지만 분장을 지우면 매우 도회적인 분위기다.

“‘스카이 캐슬’ ‘히어로는 아닙니다’를 연출한 조현탁 PD가 선생님은 딱 도시 여자 이미지인데 왜 맨날 ‘몸뻬’ 연기만 하냐고 묻더라. 새롭게 변신을 해야 하는데, 하이힐 신고 매니큐어 칠하는 게 질색이라 엄두가 안 난다.”

-억척 어멈 연기로는 따를 배우가 없긴 하다.

“영화 ‘인어공주’에서 해녀 출신 때밀이 연기를 할 때다. 탕에서 헤엄치다 나오니 팬티가 물에 젖어 엉덩이에 올라붙었는데, 그걸 고무줄을 딱 튕겨서 바로잡는다. 나도 모르게, 하하!”

-’두심’이란 이름이 본명이더라.

“여배우 이름으론 별로니 가명을 쓰라고 했는데 내가 고집을 피웠다. 우리 아버지가 ‘말 두(斗)’에 ‘마음 심(心)’ 자를 써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한 되 두 되가 아니라 한 말 두 말 하는 큰마음을 갖고 살라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러브콜도 많이 받으셨는데, 응하지 않은 걸 백번 잘했다고 생각하시나?

“아유, 말해 뭐 해. 요즘 국회의원들 보면 정말 속상하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건재한 게 정치인 덕이 아니다. 새벽 촬영 나갈 때마다 그 이른 시간에 버스 타고 출근하는 분들을 본다. 공장 굴뚝엔 이미 연기가 피어오르고 환경미화원들은 청소를 한다. 밤이고 낮이고 시장에서 공장에서 거리에서 일하는 분들이 이 나라를 만들어왔다.”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

“뾰족하게만 굴지 말고 우리 꼰대들에게 마음을 좀 열어달라(웃음).”

-아카데미상에도 도전하셔야지.

“영어를 못해서. 상을 받아도 ‘땡큐, 땡큐’만 하다 내려올까 겁난다, 하하하!”

억척 어멈 연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 고두심은 "도회적 이미지의 배역도 소화하고 싶지만 뾰족구두에 매니큐어 바르는 게 싫어서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고두심

1951년 제주 출생. 제주여고 졸업 후 MBC 공채 5기 탤런트로 입사했다. ‘사랑의 굴레’(KBS) ‘춤추는 가얏고’(MBC) ‘덕이’(SBS) 등으로 지상파 3사 연기 대상을 모두 받은 유일한 배우. ‘친정 엄마’ ‘댄스 레슨’ ‘불효자는 웁니다’ 등 여러 연극에 출연했다. 영화 ‘빛나는 순간’으로 아시아 필름 페스티벌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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