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의 경제수다방]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감상문
2018년 방영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를 뒤늦게 보았다.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한” 법원을 맞들기 위한 초임 판사들의 법원 내 직장 투쟁기였다. 울 장면도 아닌데, 눈물이 몇번 났다. 국민참여재판이 사실상 스토리의 클라이맥스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 대반전을 보면서도 울었다. 노무현·문재인, 한동안 변호사들의 시대였고, 윤석열 이후 검사들의 시대가 왔다. 변호사나 검사가 주인공이든 빌런이든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많았다. 그에 비해 판사, 특히 법원 이야기는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것이어서 아주 재밌게 보았다.
한국은 상명하복의 질서, 즉 군대식 질서로 공화국을 만들었다. 후진국 혹은 개발도상국 시절에 태어나 장년이 된 사람들과 날 때부터 선진국 국민이었던 신입 직원들이 정부나 공기업은 물론이고, 민간기업 여기저기서 문화적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게다가 좋든 싫든, 사회적으로 탈군대 문화가 자연스럽게 확산되면서, 군사 문화와 탈군사 문화가 충돌하게 되었다.
대기업이 젊은 직원들이 원치 않는 군대 문화를 먼저 벗어버리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가 ‘서류 없는 사무실’을 추구하면서 서류를 놓아둘 책꽂이가 필요 없게 되었다. 나아가 프린터를 중심으로 자리를 배치할 이유도 없어졌다. 라인형 자리에서 오는 위계를 벗어버리면서, 현대자동차는 많은 성과를 냈다. 어느 분야보다 인재 확보가 관건인 정보기술(IT) 업계에서의 직장 민주주의는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좋든 싫든, 한국의 기업들은 군대식 중앙형 조직에서 점점 더 민주주의적인 분산형 조직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검사 동일체 원칙, 군대 문화 유산
검사들이 자랑하는 ‘동일체 원칙’은 전형적인 군대 문화 유산이다. 아마 한국의 국가기관 가운데 가장 늦게 바뀔 조직이 검찰청일 것이다. 이미 중앙부처들은 과거의 음습한 방식으로 더는 사무관급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판사들은? 드라마 속 장면이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면, 초임 판사로 상징되는 젊은 판사와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인 부장 판사 사이에서도 대기업은 물론 많은 중견기업과 중소기업도 지금 겪고 있는 탈군대 문화의 흐름이 생겨난 것 같다.
한때는 삼성에서 “가족”을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정리해고가 빈번해지면서 “가족을 자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반문과 함께 그런 전도된 가족주의는 무너졌다. 회식과 야근으로 상징되었던 군사 시절의 수직형 위계가 사실은 21세기 창조 경제 시대에는 생산력을 약화시키고, 창의적 발상을 저해한다는 게 이제 정설이 되었다.
용산은 어떨까. 아직 대통령실은 한국형 군사 문화의 최정점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은 군사 문화에서의 수직적 위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맞물리면 절정에 달하게 된다. 윤석열 정부의 얼토당토않은 해프닝성 정책은 직장 민주주의 같은 새로운 스타일은 생각해보지 못한 군사적 조직에 익숙한 검사들이 좀 더 자유로워진 한국 사회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충돌로 보인다.
한때 “봉숭아 학당” “오합지졸 콩가루 집안”이라는 조롱까지 들은 민주당은 군사형 조직에서는 일찍 벗어났다. 그 시절의 민주당은 나름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도 최근에는 군대형 상명하복 조직으로 다시 복귀하는 중이다. 심지어 ‘옹립’이라는 왕조 시대 용어까지 다시 등장했다.
‘108 번뇌’라는 말이 국민의힘에서 흘러나왔다. 총선 결과를 보면서 집권 여당은 한탄했지만, 직장 민주주의, 아니 정당 민주주의 관점으로 보면, 지금이야말로 국민의힘이 조직론적으로 혁신하기 딱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를 아직 안 본 고위직 인사들에게 꼭 좀 한 번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드라마의 해피엔딩은 부장판사 몇명이 초임 판사들에게 양보를 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현실에서는 거의 없는 일이어서, 정말 이 장면을 보면서 울었다.
여야 정당 ‘직장 민주주의’ 고민을
정치에서 일사불란이 좋은 것은 아니다. 선진국이 별게 아니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양심대로 움직일 수 있고, 이걸 매뉴얼과 시스템을 통해서 혁신의 에너지로 삼는 나라가 바로 선진국이다. ‘탈권위 시대’를 노무현이 걸었는데, 그 마무리는 국민의힘이 할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수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식 시대로 돌아가서는 별 미래가 없다. 보수정당이 직장 민주주의에 성공하면, 한국은 명실상부한 진짜 선진국이 된다. 108 번뇌, 경제학적으로는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가 일어날 절호의 기회다. 윤석열, 이재명, 국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장 민주주의가 이 시대의 과제임을 생각해보시면 좋겠다.
우석훈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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