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 중: 가스·석유, 한 번도 안 씀’ [오동재의 파도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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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일화로 잘 알려진 글이다.
매장량도 확인되지 않은 단계에서 대통령이 발표하는 이례적 기자회견의 이유도 한국인 머리 깊이 박힌 '석유가스=에너지 안보' 때문일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 탄소중립 경로에서 가스 수요는 2050년까지 지금보다 78%, 석유 수요는 76% 줄어든다.
오늘 기준 알리안츠, 에이치에스비시(HSBC) 같은 글로벌 금융기관들 중 116곳이 신규 석유·가스 자원개발 사업 투자를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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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재 | 기후솔루션 연구원
‘판매 중: 아기 신발, 한 번도 신지 않음(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일화로 잘 알려진 글이다. 친구들과 6 글자로 소설을 만들 수 있냐는 내기에 헤밍위이가 쓴 글이다.
만들었지만 쓰이지 못해 슬픈 게 아이 신발 뿐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동해안 심해 가스·유전 탐사를 발표한 이후, 그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자원 빈국 대한민국’이란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없던 관심도 생기고 눈길이 간다. 매장량도 확인되지 않은 단계에서 대통령이 발표하는 이례적 기자회견의 이유도 한국인 머리 깊이 박힌 ‘석유가스=에너지 안보’ 때문일 것이다.
낮은 확률과 높은 시추·개발 비용을 뚫고, 사업 영향 지역인 포항 시민들의 반대가 없다면 가스전은 2035년부터 생산을 시작한다. 지금부터 10년도 더 뒤의 일이다. 그렇게 시작된 생산은 한국 정부의 탄소중립 시점인 2050년을 훌쩍 넘긴 2065년이 되고 나서야 운영이 종료된다.
그럼 동해 가스·석유전의 운영 시점에 한국은 가스가 필요할까? 안타깝게도 부정적이다. 이미 한국 정부는 에너지 믹스에서 가스 의존도를 줄이고 있다. 정부는 가스 수요를 2036년까지 현재 수준 대비 16% 줄인다는 계획이다. 가스 수요의 가장 큰 축인 가스 발전량은 2038년까지 52%가 줄어든다. 동해 가스전이 운영에 돌입할 때쯤, 이미 수요가 반토막이 나는 것이다. 탄소중립 이행에 따라 재생에너지 확대 및 전기화가 이후 가속화되면 수요는 더 빠르게 줄어든다.
그렇다면 한국이 중동 산유국처럼 수출로 돈을 벌 수 있을까. 글쎄다. 가스·석유의 가격 불안정성이 코로나와 러·우 전쟁으로 높아져버린 탓에 전세계 수요처들은 이미 재생에너지 전환과 전기화로 방향을 틀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모든 시나리오에서 화석연료 수요 감소를 전망한다. 국제에너지기구 탄소중립 경로에서 가스 수요는 2050년까지 지금보다 78%, 석유 수요는 76% 줄어든다. 동해 가스전은 결국 급격히 사장되는 시장에서 뒤늦게 후발주자로 뛰어들어 수많은 공급업자와의 경쟁에 치일 운명이다.
이제까지 석유·가스 사업으로 단물을 다 누린 행위자들은 시장에서 손을 떼고 있다. 오늘 기준 알리안츠, 에이치에스비시(HSBC) 같은 글로벌 금융기관들 중 116곳이 신규 석유·가스 자원개발 사업 투자를 중단했다. 은행만으로 따지면 50대 은행 중 26개 은행이 투자 중단을 선언했다. 자산 규모로 따지면 44%에 달한다. 동해 가스전의 시추가 성공적이어서 개발 자금 조달이 이뤄질 2030년쯤이 경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산유국들도 하나 둘씩 신규 석유·가스전 인허가를 중단하거나, 퇴출 연도를 못박고 있다. 유럽의 덴마크와 스페인, 남미에선 코스타리카와 콜럼비아가 신규 인허가 중단 혹은 퇴출 연도를 못박았다. 총선을 앞둔 영국은 북해 유전이 쟁점으로 부상했다. 승리가 점쳐진 노동당은 집권 시 신규 석유 가스전 인허가 전면 중단을 공약하고 있다. 국내 유전 개발이 영국 국민들의 에너지 요금뿐 아니라, 에너지 안보에도 도움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재생에너지의 빠른 보급과 확보가 에너지 가격 인하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동해 가스전 부지의 상당 부분은 대규모 해상 풍력 추진이 가능한 입지와 겹쳐 있다. 가스전 개발 본격화 시, 인허가는 물론 공적 투자 자금 확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저무는 시장에 베팅하느라 정작 중장기 에너지 안보가 보장된 미래를 놓치는 꼴이다.
유전 개발은 자원 빈국 한국 국민이라면 한 번쯤 염원해본 꿈이겠지만, 이제는 바뀐 시대를 준비할 때다. 가판대에서 누구도 안 살 가스·석유를 눈물을 머금고 팔아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닌 우리 다음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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