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르는걸 화폭에 … 화가는 신호 수신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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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남자 둘이 있다.
그림의 배경은 중세의 어느 마을인지 놀이공원 디즈니랜드인지 알 수 없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나는 문득 찾아오는 것들, 문득 떠오르는 것들을 그린다. 수동적인 그림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나는 포착된 신호를 출력하는 일종의 수신기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우리 존재는 이야기에 빚을 지고 있다. 우리 DNA가 유전자를 실어나르는 것처럼 우리의 그림이 이야기를 실어나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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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꿈·일상·미디어 등
다양한 소재를 변주해와
점묘화 같은 풍경화 비롯해
신작·미공개작 25점 펼쳐
걷는 남자 둘이 있다. 그림의 배경은 중세의 어느 마을인지 놀이공원 디즈니랜드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보라색 옷을 입은 남자는 만화영화 속 악당 같은 모습이다. 그보다 앞서서 지팡이를 들고 흰 모자를 쓴 신사 또한 배경과는 이질적이다. 뒤로는 숨어 있는 사슴들이 보인다.
얼마나 낯선 조합인가. 2022년작인 이 작품의 제목은 '자본주의의 발걸음'이다. 밝고 경쾌한 색채로 그려진 그림 속에 작가는 자본주의가 팽배한 유럽 문명에 관한 비판적 이야기를 슬며시 숨겨놓았다.
임동승(48)의 그림은 가까이서 보면 추상화, 멀리서 보면 구상화처럼 보인다. 점을 찍어 캔버스를 채우는 특유의 방식 때문이다. 작가의 10번째 개인전 '그림의 틈새와 잃어버린 이야기들'이 오는 서울 통의동 아트스페이스3에서 열린다. 25점의 미공개 작품 및 신작을 선보인다. 환상과 꿈, 일상과 미디어 등에서 가져온 소재를 변주해온 작가의 다채로운 실험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나는 문득 찾아오는 것들, 문득 떠오르는 것들을 그린다. 수동적인 그림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나는 포착된 신호를 출력하는 일종의 수신기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네 개의 주제로 작품들을 선별한 작가는 '풍경화들'에서는 작가가 저장해두었던 풍경의 이미지와 모험소설, 그리고 이전의 드로잉을 접합시킨 일종의 낭만주의적 스케치를 선보인다. 인간세계의 멸망 이후를 상상해 그린 '우리가 만약 모든 것을 잃는다면'은 필터를 씌운 것처럼 흐릿하다. 그에 따르면 '빈 공간, 풍경의 그림'이다. 작가는 "여러 기법을 실험하다 캔버스를 다 채우지 않고 비우는 걸 발견한 것이 전환점이 됐다. 전통적 완성의 개념에서 거리를 둠으로써 내 작업의 운신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점을 찍는 방식은 두가지다. 캔버스에 가로세로로 직선을 그어 그리드를 만들고, 그 안에 일정한 크기 점을 찍어 넣는다. 찍어 넣은 '허점'으로 이미지는 구성되고, 이 점들 사이의 빈틈, 즉 작은 회색 공간은 그림의 일부가 된다. 완성된 그림에 회색 점을 규칙적으로 찍어 넣는 '노이즈' 방식도 활용한다.
폴 시냐크나 조르주 쇠라 등의 인상주의 점묘화를 연상시키거나, 로이 리히텐슈티인 등 팝아트 작가들이 떠오르는 기법이다. 하지만 작가는 "앞세대와 달리 그리지 않고 비워진 '회색 공간'이 중요했다. 무의미의 의미를 담고 싶어서다. 다 그린 그림에 다시 점을 찍어 지우는 행위를 하지만, 문맥상으로 이것은 더하는 행위다"라고 설명했다.
비우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이야기에는 빈틈이 없다. 종교화를 연상시키는 초대형 삼면화 '전생담 제9번'은 부처의 전생을 떠올리며 그렸다. 아기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영웅처럼 보이는 인물과 달아나는 새, 활활 타는 불, 곰인형 등 '초현실적' 이미지들이 중첩됐다. 폭발하는 괴생명체는 현대사회에 관한 은유다. 작가는 "우리 존재는 이야기에 빚을 지고 있다. 우리 DNA가 유전자를 실어나르는 것처럼 우리의 그림이 이야기를 실어나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가장 멀리서 봐야 하는 그림은 초상화 시리즈다. 수년 전 신문지에 연필로 스케치해놓은 인물들을 거칠게 점을 찍어 표현했다. 가까이에선 물감 덩어리만 눈에 보이지만 멀어질수록 그 처연한 인물들의 표정이 명징해진다.
김진주 미술연구자는 "이미 비워진 곳을 비워놓는 것이 그가 택한 보기의 방식이다. 비어 있음을 보는 그의 유연한 태도는 이야기와 점, 틈을 경유해 회화로 이룩한 화면 다음의 세계에서 다시금 떠오른다"고 설명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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