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교육? [서울 말고]

한겨레 2024. 6. 3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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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화고에서 일하는 교육공무직 노동자들을 만나 심층 면담을 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교사와 교육공무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학교 구성원들의 노동은, 적어도 노동에 관해서 학생들의 잠재적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뜻이다.

따라서 단지 교권이 아니라 교사의 노동권, 그리고 교육공무직 노동자들의 법적·제도적·문화적 권리는 현재 학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권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교육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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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에서 전주페이퍼 사망노동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 진상규명과 안전대책 수립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특성화고에서 일하는 교육공무직 노동자들을 만나 심층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한 교사의 죽음으로 교권 침해에 대한 이슈가 언론을 달구던 때였다. 그런데 면담 과정에서, 교사를 죽음까지 몰고 간 학부모들의 민원 전화를 가장 먼저 받는 사람들이 교육공무직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에 필자는 꽤 놀랐다. 민원을 넣는 학부모가 가장 감정이 격한 상태일 때, 교사조차 아니라서 몰지각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무시해도 된다고 여기는 위치에서, 교무실무사들은 수시로 그런 전화를 상대하고 있었다.

교무실무사만이 아니었다. 행정실무사는 급식에 공지되었던 식단과 다른 메뉴가 나왔다고 항의하거나, “왜 우리 애 밥을 굶겼느냐”는 전화까지 받고 있었다. 행정실무사의 경우 민원 처리가 업무 범위에 포함되긴 한단다. 하지만 마치 콜센터 노동자들처럼 교육공무직 노동자들도 일상적으로 시달리고 있다니, 미처 몰랐던 일이다. 그 면담에서 필자는, 같은 교육공무직이라도 위계화된 노동 분업에 따라 노동자들의 각기 다른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경험들의 공통점은 한 마디로 ‘타자화’였다. 타자화란 차별, 배제, 때로는 시혜로도 나타나는, ‘어쨌거나 너는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대상화를 뜻하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공식적 교육과정에서 노동은, 정권의 변화에 따라 교과서에서 그 내용이 달라져 왔고, 직업윤리 차원이나 매우 기본적인 법적 권리에 국한해서 다루어져 왔다. 심지어 2022년 개정교육과정에서는 ‘노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내용이 총론에서 완전히 삭제되었고, 교과목의 단원별 성취 기준에서는 학교급에 따라 노동이란 용어가 아예 사라지거나 내용이 축소되었다. 지자체별로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실시하는 지역들이 생겨났지만, 1년에 두 시간짜리 교육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이런 교육 현실에서 학생들이 노동의 의미, 가치, 그에 대한 태도, 행동 양식 등을 내면화할 수 있는 계기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매일 만나는 노동을 통해서일 것이다. 다시 말해, 교사와 교육공무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학교 구성원들의 노동은, 적어도 노동에 관해서 학생들의 잠재적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뜻이다. 따라서 단지 교권이 아니라 교사의 노동권, 그리고 교육공무직 노동자들의 법적·제도적·문화적 권리는 현재 학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권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교육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전주시의 한 제지공장에서,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그 회사에 취업한 열아홉 살 노동자가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 학생은 필자가 해마다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진행하러 다녔던 학교의 졸업생이다. 그리고…, 며칠 전엔 청주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당직전담사로 일하던 교육공무직 노동자가 철제 교문에 깔려 결국 숨졌다. 전쟁이나 기아 같은 상황도 아니고, 단지 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 노동자가 하루 평균 여섯 명이 넘는 나라라면, 상시적 국가 재난 사태를 선포하고 이에 대처해야 하는 게 아닐까?

2022년 개정교육과정은 노동을 삭제하는 동시에 ‘모두를 위한 교육’을 표방하였다. ‘모두를 위한 교육’은 특수교육 대상자와 학습이 부진한 학생들을 장애, 이주 배경 등 학생의 다양한 특성으로 구분하여 지원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교육 정책을 말한다. 언뜻 보면 좋은 얘기다. 그런데 모두를 위한 교육이란 과연 무엇을 위한 교육인 것일까?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죽지 않고, 차별받지 않으면서 인간답게 사는 것? 아니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동에 착취당하기 위해 목숨을 걸게 하는 것? 이 질문에 응답하지 않는 모두를 위한 교육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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