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과 끝 시집을 두 손에 들고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시를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자신을 먼저 들여다봤던 시인의 언어를 빌어 나를 가누고 가늠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미래의 나’를 꿈꿀 수 있도록 한다. 최근 오병량 시인의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와 황동규 시인의 ‘봄비를 맞다’를 읽으며 가누고 가늠하는 일로 행복했다. 밑줄 쫙쫙 그어가며 그 행간을 오래 서성이며.
오병량 시인이 등단 11년 만에 첫 시집을 들고 나타났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군복무를 마치고 문창과에 재입학했던 이십대 중반의 그는 국문과 소속의 내 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시를 푯대 삼아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밟던 중 등단하더니 다시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작은 식당을 차렸다. 좀체 그의 시를 보기 어려워 안부가 궁금하던 차였다.
시집을 여는 ‘시인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봄 앞에 앉아, 나는 여태, 나의 주어가 못 되는 처지입니다”. 나도 같이 눌러앉을 자세를 잡는다. “젖은 베개를 털어 말리고 눅눅한 옷가지에 볼을 부비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쓰다 만 편지를 세탁기에 넣고는 며칠을 묵”(‘편지의 공원’)히면서 버텨냈을 그의 시편들은 얼룩이 많고, 일렁임이 많고, 단애가 많다. 젊은 시인의 첫시집답다. 이루 잡히지 않는 가족사와 유년의 기억, 청춘과 사랑과 실연의 흔적, 그로 인한 막막한 방황과 모색이 숲처럼 묵묵하고 사슴처럼 튀어 오르고 음악처럼 새어난다. 오래 쓴 편지처럼.
“어떻게 빈 종이만 쓰다듬는 중일까, 책상이 다 뜨거워지도록/ 그는 다정했지만, 밑줄이 다 망가지도록 제 마음만 달랬다/ 바람인지, 바닥인지 모를 일이나 무언가는 쓸려와/ 여리게 밀려난다 빗소리였다/ 마음을 씻기는/ 줄곧 살아냈으나 끝끝내 사라지지 않을 늦밤”(오병량, ‘봄눈’). 나는 ‘늦밤’에 ‘시’를 넣어 읽는다. 고군분투했을 그에게 전하고 싶다. 생업은 시 쓸 시간을 줄게 하는 게 아니라 더 당당하고 창의적인 시인이 될 자유를 준다고. 어쩜 내게 건네는 당부일지도.
‘봄비를 맞다’는 등단 66년 차인 황동규 시인의 18번째(시인의 말에 따르면 마지막이 될) 시집이다. 이십대의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시를 썼고 이후 그의 시에 단편의 글들을 쓰기도 했다. 그는 시집의 뒷글을 이렇게 닫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 그의 시편들은 노년에 맞이하는 ‘진짜 꽃의 삶을 사는 기쁨’, 그 환한 기쁨으로 찬란하다. 나의 80대도 이처럼 환했으면 한다.
‘앙스트블뤼테’(불안의 꽃)라는 말이 있다. 마르틴 발저가 79살에 썼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생존이 위태로울 때 사력을 다해 마지막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으려 한다는 뜻의 생물학적 용어다. 노시인의 앙스트블뤼떼는 놀람과 긍정과 경탄의 간투사와, 죽비를 맞은 듯 서늘한 아포리즘에서 만개한다.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봄비를 맞다’). 입말인 듯 쉽고 눈에 선하면서 “끄트머리가 확 돋보이는 시”(‘사월 어느 날’)다.
“아침이 가고 저녁이 온다./ 혼자 있음./ 혼자 없음./ 지내다 보니/ 있음이 없음보다 한참 비좁고 불편하다. (…) 마지막 시 쓰기 딱 좋은 저녁이 올 것이다.”(‘코로나 파편들’) 노시인이 굳게 지켜낸 품격과 긴장은 늙음과 질병, 코로나의 시간에 호응하면서 맞선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순간순간 터져 나는 탄성과 느낌으로 시의성의 최대치에 도달한다.
젊은 시인의 첫시집과 원로 시인의 끝시집에서, 나는 다시 배운다. 시의 힘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그 외로움을 젊은 시인은 기억과 고백의 지속의 시간으로, 원로 시인은 현현과 독백과 순간의 시간으로 견지해낸다. 또한 시의 힘은 소소한 것에 깃든 압정과도 같은 한 줄 통찰에서 나온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 삶이 외롭고 힘에 부치는 날들이 태반이지만, 그러함에도 우리가 사소한 일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삶을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새삼 깨닫는다. 이런 평범한 시간들이 섬광과도 같은 아름다운 문장 하나로 발견되는 것이 시라는 것도.
휴가철이 시작되었다. 기억의 지속이든 초월의 순간이든, 시적인 시간에 물들기 위해 시집 한 권 챙겨가는 여행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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