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된 사람들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6. 3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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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25편
외젠 이오네스코의 「코뿔소」
현대 부조리극 대표 작가로 꼽혀
이오네스코 삶 마찬가지로 난장
父의 폭력과 권위주의 시달려
루마니아 기성세대에도 회의
파시즘 쫓다 공산주의 돌아서
맹목적 이념‧인간 이중성 비판

작가 이오네스코의 희곡에선 소통과 소외, 억압과 자유, 굴종과 반항이 거칠게 충돌한다. 맹목적인 이념, 권위주의, 인간의 이중성을 향한 강렬한 반감은 이오네스코 희곡의 자양분이 됐다. 그의 대표작 「코뿔소」는 파시즘에 열광하다가 권력이 바뀌자 공산주의자로 돌아선 루마니아의 기성세대를 풍자한 작품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코뿔소'는 도처에 있다.

외젠 이오네스코는 루마니아에서 인간의 이중성과 부화뇌동을 목도하고 이를 비판하는 희곡을 남겼다. 사진은 그의 대표작 「코뿔소」.[사진=뉴시스]

루마니아 출신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1909~1994년)는 사무엘 베케트, 장 주네, 페터 한트케 등과 함께 현대 부조리극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부조리극답게 이오네스코의 희곡은 어지럽고 난해하다.

주제는 모호하고, 내용은 개연성이 없으며 인물들은 제각각 떠든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난장亂場을 보며 극도의 혼란을 느낀다.

이오네스코의 희곡은 소통과 소외, 억압과 자유, 굴종과 반항이 거칠게 충돌한다. 그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이오네스코는 1909년 루마니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오네스코가 두살 때 법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공부를 핑계로 가족에 소홀했고, 어머니와 심각하게 다투는 일이 잦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과 권위주의는 이오네스코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아버지는 징집돼 루마니아로 돌아갔지만, 곧 가족과 소식을 끊어버렸다. 파리에 남은 가족들은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다. 더러운 가구와 집기들이 굴러다니는 비좁은 집은 훗날 희곡에서 황량한 무대로 재현됐다.

이오네스코는 14세 때 아버지를 찾아 루마니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성장한 그에게 루마니아어로 말하고, 글을 쓰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사춘기 시절 언어의 장벽을 겪으면서 이오네스코는 소통의 수단인 언어가 오히려 오해와 불신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 깨달음 이후 이오네스코는 '말하는 내용'이 아닌 '말하는 방식'에 눈을 돌렸다.

1920년대 후반 대공황을 겪은 이후 루마니아에는 파시즘 열풍이 불었다. 대중만이 아니라 지식인까지 파시즘에 열광했다. 아버지가 파시즘에 빠져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을 박해하는 데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오네스코는 크게 실망한다.

독일과 동맹을 맺은 루마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렸고, 그 결과 80만명이 넘는 루마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종전 후 루마니아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이오네스코의 아버지는 루마니아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돌변했다. 그 모습에 좌절한 이오네스코는 종전 후 프랑스로 이주해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차우셰스쿠 정권에 반대하는 티미쇼아라 시위로 루마니아의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다. [사진=위키피디아]

맹목적인 이념, 권위주의, 인간의 이중성을 향한 강렬한 반감은 이오네스코 희곡의 자양분이 됐다. 소설을 각색한 「대머리 여가수(1950년)」가 연극 무대에 오른 이후 「수업(1950년)」, 「의무의 희생자(1952년)」 등의 연극이 성공하면서 이오네스코는 전후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오네스코의 여러 작품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바로 「코뿔소(1959년)」다. 「코뿔소」는 파시즘과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오네스코가 목도한 집단의 광기, 인간의 나약함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막이 오르면 어느 시골 마을의 평화로운 전경이 펼쳐진다. 난데없이 코뿔소가 난입하면서 마을의 평화는 무너진다. 사람들이 하나둘 코뿔소로 변하면서 마을은 코뿔소 울음소리로 소란스럽다. 마을 주민들은 코뿔소의 진위를 놓고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한다.

주인공 '베랑제'는 술에 절어 사는 몽상가다. 그는 좋아하는 여자 '데지'만 보면 얼어붙는 소심한 남자다. 그에게는 코뿔소의 출현보다 데지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면 베랑제의 친구 '장'은 거칠고 직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면 공격적으로 변한다. 그는 동시대의 변화나 유행에 낙오해선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퇴임한 교사인 '보타르'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다. 그는 실증적인 것을 신봉하는 합리주의자라고 자처한다. 보타르는 처음에 코뿔소의 출현을 믿지 않다가 코뿔소를 직접 본 이후 코뿔소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도 기꺼이 코뿔소가 된다.

젊은 엘리트 '뒤다르'는 똑똑하고 신중한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코뿔소로 변신하고 절친한 친구 베랑제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리자 태도를 바꾼다. 뒤다르는 베랑제에게 현실을 합리적으로 볼 것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하는 위기 상황의 심각함을 축소한다. 그는 늘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면서 비겁하게 처신하다가 결국 코뿔소의 대열에 합류한다.

베랑제가 사랑하는 여인 '데지'는 병에 걸린 베랑제를 정성껏 간호하면서 그의 곁에 머문다. 그녀는 코뿔소가 가득한 마을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데지는 사랑이 병적인 감정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베랑제는 코뿔소로 가득 찬 마을에서 데지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함께 아이를 낳고 살자고 제안한다. 데지는 베랑제의 제안을 거부한다. 그녀는 오히려 코뿔소들이 더 즐거워 보인다고 답한다. 마을에 홀로 남은 베랑제는 절규한다. 정의감, 지성, 우정, 사랑 어느 것도 코뿔소 바이러스 앞에서 무력했다. 그럼에도 베랑제는 미친 세상에서 자신은 끝까지 인간으로 남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코뿔소'는 파시즘에 열광하다가 권력이 바뀌자 공산주의자로 돌아선 루마니아의 기성세대를 풍자한 작품이다. 루마니아의 암흑기는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1989년)가 처형될 때까지 지속됐다. 코뿔소의 의미는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면서 법과 질서를 흔드는 자들, 타락한 권력에 기계적으로 동조하는 자들은 너무도 많지 않은가.

지금도 '코뿔소'는 도처에 존재한다. 코뿔소와 흡사한 권력자는 언론을 동원해 비판자들을 적대세력으로 낙인찍는다. 그리고 장, 보타르, 뒤다르와 같은 사람들은 '중립'과 '합리성'을 내세우다가 슬그머니 코뿔소 대열에 합류한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오네스코는 니체가 언급한 '괴물'을 '코뿔소'로 대체하면서 강렬한 부조리극을 완성했다. '코뿔소가 지배하는 세계'에 동조하지 않는, '베랑제'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지극히 현재적이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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