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포커스] 빛은 투과·열은 차단… 아프리카 비닐하우스에 배추 자라네
방사율 조절 '투명 열차단 필름'
내부 열 빼내는 '복사냉각'까지
저렴한 소재·쉬운 공정이 장점
차 창문에 붙이면 내부 12도 ↓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첨단과학기술연구관. 3층의 기능성 초미립자 공정연구실로 들어서자 각종 비커와 깔때기, 실험도구가 즐비한 실험실 한쪽에 거짓말 탐지기처럼 생긴 장치가 놓여 있었다.
한쪽은 '일반 PET 필름', 다른 쪽은 '고방사 열차단 필름'이란 표시가 돼 있었다. 손을 넣어볼 수 있게 앞이 트인 사각 상자의 중간 즈음에 투명한 필름이 가로로 끼워져 있었다. 전원을 켜자 위쪽에서 빛과 함께 따뜻한 열이 나왔다. 필름 아래 쪽에 각각 왼손과 오른손을 집어넣자 일반 PET 필름을 끼운 쪽의 왼손은 단번에 따뜻해졌지만 열차단 필름이 끼워진 쪽의 오른손은 열감이 확연하게 덜했다. 빛은 투과시키면서 열이 통과하는 것을 막아 일종의 '냉장고 효과'를 내는 특수 열차단 필름 덕분이다.
김중현(69) 연세대 명예교수(화공생명공학과) 겸 포스텍 특임교수(화학공학과)는 "빛의 파장대에 따라 특성을 제어하는 고분자 필름 소재를 개발했다"면서 "어떤 에너지나 조작을 가할 필요 없이 고분자 코팅액을 입히는 것만으로 자외선부터 가시광선, 근적외선 및 원적외선의 투과와 차단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험실 한쪽에는 '동작 전극 필름', '상대 전극 필름', '광학투명접착(OCA) 전해질 필름' 등의 명칭이 붙은 커다란 두루마리들이 걸려 있었다. 다른 쪽에는 길쭉한 종이상자에 담긴 고분자 필름 두루마리가 세워져 있었다.
◇붙이기만 하면 서늘해진다
김 교수는 "농작물을 키우는 비닐하우스나 온통 유리로 뒤덮인 건물의 유리창, 자동차의 창문 등에 우리가 개발한 필름을 붙이기만 하면 내부 온도가 떨어진다.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 등 기후조건 때문에 농사가 힘든 국가들에서 필름을 가져가 농사를 짓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서 "건물과 자동차에 필름을 적용하기 위한 테스트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화학공학 학·석사를 거쳐 미국 리하이대에서 화학공학 박사를 받은 후 미국 모톤(Morton)에서 책임연구원을 지낸 김 교수는 나노화학공정을 이용한 고분자소재 합성법 연구를 파고들었다. 연세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40년 가까이 나노·마이크로 고분자소재 합성 한 우물을 팠다.
고분자는 분자량이 1만개 이상인 물질로, 플라스틱 등 합성고분자가 주를 이룬다. 생활용품부터 반도체, 배터리, 전자소재까지 폭넓게 쓰인다. 일상생활에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이 흔한 물질을 잘 설계하고 배합하면, 한번의 코팅으로 빛을 만났을 때 특정 파장대를 흡수, 산란, 반사, 굴절, 회절하도록 조절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하면 빛과 열이 건물이나 차량 등에 원하는 만큼만 들어오게 할 수 있다. 더울 땐 시원하고 너무 밝을 땐 적당히 빛을 차단하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교과부 차관 지낸 후 바로 실험실 '컴백'김 교수는 지난 10여년간 열과 빛을 자유자재로 제어하는 필름 소재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2009년 1월부터 2010년 8월까지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을 맡아 과학기술 정책 현장에서 잠시 '외유'를 했지만 차관에서 물러난 직후 연구실로 뛰어가 연구를 재개했다. 지금 그가 상용화에 매달리는 소재는 차관을 지낸 후 내놓은 연구성과다.
광대역 파장대의 빛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특히 '열'을 잡는 적외선 파장대에 주목한다. 빛은 투과시키면서 열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원하는 만큼 투과하는 투명한 필름이 나온다면 냉장고나 에어컨 효과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외선은 전자기파의 하나로,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길고 마이크로파보다는 짧다. 적외선의 파장 범위는 780나노미터(㎚)에서 1㎜까지로, 파장에 따라 가시광선 영역과 가장 가까운 780㎚에서 3마이크로미터(㎛) 대의 근적외선, 3㎛에서 30㎛ 대의 중적외선, 30㎛에서 1㎜ 대의 원적외선으로 구분된다. 김 교수 팀은 가시광선을 투과시키면서 근적외선을 조절하고 중·원적외선의 방사율을 조절해 태양열을 조절하는 '투명 열차단 필름'을 개발하고 양산을 위한 제조공정까지 완성했다. 국내 연구현장에서는 연구자가 정년을 마치는 순간 정부 연구비가 사실상 끊긴다. 수년 전 정년을 끝낸 김 교수는 현재는 자비를 동원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필름을 도입하려는 수요가 있으면 바로 대량 제조할 수 있도록 양산 준비도 마쳤다.
◇햇빛 쨍쨍 내리쬐는 자동차 내부 12도 이상 낮아져
사각 유리상자에 이 필름을 코팅해서 태양이 가장 뜨거울 때와 동일한 조건을 가해서 실험을 해봤다. 그 결과 필름을 안 붙인 상자의 내부 온도는 2시간 만에 41도에 달했지만 필름을 붙인 상자는 23도에 그쳤다. 박재중 연세대 신소재공학과 연구교수는 "열차단 필름을 부착하지 않은 차량과 고방사 열차단 필름을 붙인 차량을 햇빛 아래 2시간 정도 뒀을 때 차량 내부 온도는 12도 이상 차이가 났다"고 밝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열 차단뿐 아니라 내부의 열을 밖으로 빼내는 '복사냉각'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근적외선부터 중적외선, 원적외선까지 제어하면 'IR 스텔스 필름'이 만들어진다. 열을 내리기도 하지만 보온도 되는 소재다.
김 교수는 "IR 스텔스 필름은 아직 세계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기술이다. 지금까지는 근적외선만 조절하는 기술이 있었는데 우리는 중적외선과 원적외선까지 조절한다. 지구가 태양에너지를 받고 복사를 통해 열을 우주로 방출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쿨링이 되면서 보온도 되는 소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투명한 상태로 가시광선이 투과하며, 적외선 파장 영역 중 복사냉각이 이뤄지는 2.5~25㎛ 대를 제어하는 기술은 지금까지 없었는데 우리 기술을 활용하면 복사냉각 특성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 팀이 개발한 IR 스텔스 필름은 투명하면서 15㎛ 파장을 99% 차단한다. 뜨거운 컵에 이 필름을 두르고 적외선 촬영을 하면 열이 없는 것으로 나온다. 사람의 체온을 숨길 수 있으니 군사적 용도로도 쓸 수 있다.
박막형 태양전지와 결합하면, 해가 뜨면 창문 색이 진해지고 해가 떨어지면 옅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여름철에 해도 덜 들어오게 하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다. 자동차에서는 전기변색 기술을 활용해 유리창 색이 바뀌게 할 수도 있다. 이를 활용하면 필요에 따라 밝게 하거나 어둡게 할 수 있는 선루프를 개발할 수 있다.
◇아프리카 한여름 비닐하우스에서 배추 재배'태양열 조절'은 건축부터 자동차, 농업까지 전 산업과 사회적 이슈다. 지금까지 자동차나 건물에 열을 차단하기 위해 쓰이는 흡수형 열 차단 필름은 금속산화물소재를 쓰다 보니 빛이 강하면 표면 온도가 높아져 크랙이 발생한다. 공정이 복잡할 뿐 아니라 제조과정에서 유독한 유기용제를 사용한다. 소재 원천특허는 3M, 스미토모 등 일본과 미국 기업이 보유하고 있고 제조비용도 높다. 반사형 열 차단 필름은 가시광 투과가 적고 빛 공해, 금속 소재에 의한 위성측위시스템(GPS) 간섭 문제가 있다.
이와 달리 김 교수팀이 개발한 소재는 물을 용매로 하는 친환경 물질로, 고분자 복합체를 써서 공정이 간단하고 비용이 저렴하다. 연구팀이 차량 유리창을 이용해 열 화상카메라로 표면온도 변화를 실험한 결과 상용 흡수형 열 차단 필름을 붙인 후 표면 온도가 48도까지 올라가 표면 크랙 현상이 일어난 반면 연구팀이 개발한 필름을 붙였을 때의 표면 온도는 23도에 그쳤다.
연구팀은 기술을 알아본 몇몇 기업과 본격적인 상용화를 위해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고 있다.
김 교수는 이 기술이 폭염과 한파에 신음하는 지구촌 곳곳에 적용되면 의식주 전체를 바꿔놓는 선한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현재 기후 문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진 해외에서 관심이 더 크다. 아프리카 말라위의 한 선교사 부부는 말라위의 한여름인 작년 11~12월 비닐하우스에 배추를 심어서 풍성한 수확물을 거뒀다. 가시광선은 투과시키고 자외선과 적외선을 차단하면서 열 복사를 통해 비닐하우스 안이 바깥보다 10도 가까이 낮아진 덕분이다.
혹서기에는 기온이 45도까지 올라가는 말라위에서 11~12월은 농사를 못 짓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 농사가 가능하면 3모작이 가능하다. 배추는 채소류 중에서도 온도와 광량에 가장 민감한 종으로 꼽힌다. 이번 '배추 실험'을 한 말라위의 한인 여성 선교사는 실험 동영상에서 "말라위에서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봤다"고 말했다.
◇내부 온도 1도만 낮춰도 냉방 에너지 7% 줄어=김 교수는 "모든 작물은 온도가 35도 이상 올라가면 농사 실패다. 말라위는 한여름 기온이 45도까지 올라가는데 비닐하우스 안은 더 뜨겁다"면서 "기존 비닐하우스용 일반 비닐을 쓰면 5시간 만에 내부 온도가 70도까지 올라가고, 다른 열 차단 필름을 써도 40도가 최선인데 우리 필름은 2주간 25~35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이어 "열은 잡으면서 태양빛은 잘 들어가야 농사가 잘 되는데 이 소재는 딸기면 딸기, 배추면 배추에 맞춰 광량을 조절할 수 있다. 사람과 달리 벌레는 자외선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데, 우리 필름은 자외선을 차단해 비닐하우스 안을 못 보게 함으로써 해충 피해도 확연히 줄였다"고 밝혔다.
박 연구교수는 "비닐하우스 내부의 물방울 맺힘 문제도 개선해서 이로 인한 작물 피해도 없앴다"고 말했다. 말라위 선교사 부부는 지난 4월 두번째 실험에서도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중동에서도 이 필름을 도입해 농사를 지어보기로 했다. 다음달까지 고방사 열차단 필름을 적용한 비닐하우스를 현지에 설치할 계획이다. 동남아시아는 더워서 딸기 재배가 안 되는데, 국내 기업이 현지 정부와 손잡고 이 필름을 적용한 비닐하우스 단지를 세우기로 했다. 딸기·고추·오이·파프리카·토마토 등을 재배해 기술을 검증할 방침이다.
김 교수는 "IR 스텔스 소재를 적용한 태양열 관리 기술의 파급효과는 클 것"이라면서 "우리 기술의 임팩트가 크고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곳을 찾은 게 농업이고 아프리카"라고 말했다. 이어 "소재가 비싸거나 공정이 어렵지 않다는 게 우리 기술의 장점이다. 또, 붙이기만 하면 10년 이상 쓸 수 있다. 원료는 물에 분산돼 있는 저렴한 고분자 복합체"라고 했다. 글·사진=안경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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