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간 도널드 트럼프를 지배한 아베의 3가지 승부수 [송의달 LIVE]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예측불가능하고 즉흥적인 정책 결정을 자주 했다. 상대방에 모욕감을 주는 막말과 말 바꾸기를 지금도 종종 한다. “나는 100억 달러의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그를 4년 가까이 완벽하게 제압하고 지배한 아시아 정치인이 있다.
2018년 9월 21일 저녁 트럼프(Trump) 미국 대통령은 그날 UN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이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자신 소유의 뉴욕 맨해튼 트럼프타워 맨 꼭대기층 펜트하우스로 초대했다. 그날은 아베의 64회 생일이었다.
그곳에서 단독 만찬을 베푼 뒤 트럼프는 갑자기 방에 불을 끄고 촛불이 켜진 케이크를 직접 들고 와 “해피 버스 데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베는 “감사하다”를 연발했다.
◇아베 생일날 케이크와 노래 부르며 축하해준 트럼프
그로부터 6개월쯤 후인 2019년 4월 26~27일 이틀 동안, 아베는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인 멜라니아 여사의 49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트럼프와 골프 라운딩을 하기 위해 36시간 일정으로 부부(夫婦) 동반 방미를 했다. 미국 대통령이 부인 생일을 외국 정상, 그것도 아시아 국가 정상 부부와 함께 보낸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트럼프는 생일 회동 전에 “‘이 부부(아베 총리 부부) 정도로 내가 (멜라니아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26일 오후 백악관에서 2시간 정도 정상회담을 가진 뒤 1시간45분 동안 생일 기념 부부 동반 만찬을 했다.
27일에는 버지니아주 스털링에 있는 트럼프 소유의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함께 라운딩을 했다. 2016년 11월 17일 첫 만남부터 2년 5개월 넘게 공들인 트럼프를 향한 ‘러브 콜’의 성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고(故)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7년 1월 20일부터 2021년 1월 19일까지 1460일동안 재임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가장 친밀하고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던 외국 정상이다. 아베가 건강 상의 이유로 2020년 9월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두 사람은 3년 8개월 동안 14차례 대면 정상회담과 37차례 공식 전화통화를 했다.
최대 너비 2만km에 육박하는 태평양이 중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정상은 평균 3개월에 한 번씩 만났다. 1954년 생과 1946년 생으로 8살 차이 나는 두 사람은 서로를 ‘도널드’, ‘신조’라 부르며 세계 외교사에서 전례없는 ‘브로맨스(bromance·남성들 간의 끈끈한 정)’를 과시했다.
◇‘영혼의 친구’...세계 외교사에 기록될 ‘브로맨스’
미국 언론들은 “아베는 트럼프의 ‘영혼의 친구(a soul mate)’다”라고 평가한다. 틈만 나면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거나 통화한 두 사람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가장 확실한 우군(友軍)이자, 동반자로서 이인삼각(二人三脚) 행보를 펼쳤기 때문이다. 62세(아베), 70세(트럼프)에 교분을 맺은 두 정상은 어떻게 황금 콤비를 이루며 미·일 동맹의 신기원을 열었을까?
물꼬를 연 것은 아베였다. 그는 2016년 11월 8일 미국 대선 당일 밤 외국 정상 가운데 첫 번째로 트럼프에게 당선 축하 전화통화를 했다. 그리고 9일 후인 11월 17일 역시 외국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트럼프 타워로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트럼프를 찾아가 만났다.
이날 첫 만남에서 그는 7000달러(약 925만원) 상당의 최고급 금장(金裝) 일본 혼마 골프채를 선물하면서 트럼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베는 “트럼프와의 첫 번째 회동의 목적은 안보, 경제 관계 그리고 골프 약속 잡기 등 세 가지였다”고 했다. 처음부터 트럼프와의 사적(私的)인 교유 채널 확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①'오모테나시 외교’로 트럼프 감동
‘찰떡 궁합’이 이루어질 때까지 아베는 트럼프에게 극진(極盡)의 정성을 다하는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 외교를 했다. 황제와 같은 화려한 황금색과 스펙타클(spectacle·壯觀)을 좋아하며 황제와 같은 최상급 대우 받기를 좋아하는 트럼프의 심리를 겨냥해 상상 이상의 환대를 베풀었다.
아베는 2019년 5월 나루히토 왕세자의 제126대 일본 천황(天皇) 즉위식을 ‘계기’로 삼았다. 그는 새 천황의 최초 접견 외국 정상으로 트럼프를 낙점한 뒤 트럼프에게 “일본 천황 즉위식은 매년 열리는 미국 수퍼볼 결승전 보다 100배 중요한 행사”라며 트럼프의 허영심과 에고(ego)를 한껏 부풀렸다.
그해 5월 26일 방일한 트럼프와 함께 아베는 스모 대회 나츠바쇼(夏場所)의 결승전 센슈라쿠(千秋樂)를 관전했다. 이어 트럼프가 우승자에게 표창장을 낭독전달하고 황금색 대형 미국 대통령컵을 전달하는 특별 장면을 연출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컵 시상 직전까지 대기실에서 우승자 이름인 ‘아사노야마 히로키 레이와 원년’이라는 발음을 반복연습했다.
◇트럼프 부부와의 식비·골프 경비로만 4억원
2019년 5월 25~28일 3박4일 일정의 트럼프 일본 국빈 방문시, 아베는 만찬과 골프 경비로만 약 4억 1000만원(4022만엔)을 썼다. 그는 관용시설에서 만찬을 베푸는 관례를 깨고 트럼프 부부를 도쿄 미나토구 롯폰기(六本木) 화로구이 전문 고급 음식점으로 초대했다.
양국 정상 부부 4인 식사 비용만 206만엔(약 2100만원), 장소를 통째로 빌리는데 100만엔(약 1020만원), 가림막 설치 등에 52만엔(약 530만원), 레드카펫을 까는 데 30만엔(약 300만원)을 썼다. 뿐 만 아니다. 아베 총리는 2019년 3월 북한 핵 위기를 해결한 공로로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②엘리트 관료들인 ‘트럼프 팀’의 힘
총리실과 외무성의 엘리트 관료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트럼프 팀’이 트럼프 개인과 가족의 전모(全貌)를 면밀하게 조사·분석한 것도 큰 힘이 됐다. 이들은 ‘트럼프 연구자(Trumpologist)’라 불릴 만큼 심도있는 활동을 했다.
아베는 트럼프와 만나기 전에 항상 참모들을 트럼프 대역(代役)으로 쓰면서 수 차례 모의 연습을 했다. 트럼프의 저서들과 각종 소셜미디어(SNS) 포스팅, 언어 습관과 특징 분석은 기본이고 트럼프의 직계 및 방계 가족 동향과 최근 정보까지 빠짐없이 추적했다.
트럼프 백악관의 ‘실세(實勢)’였던 장녀 이방카 트럼프 부부(夫婦)를 ‘아베 서포터(supporter·지지자)로 만든 것도 ‘트럼프 팀’의 작품이었다. 2016년 11월 17일 첫 방문시 트럼프타워 로비에 마중 나온 이방카 부부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담장으로 올라가면서 아베는 이방카 부부의 딸 아라벨라(Arabella)를 화제로 꺼냈다.
“아라벨라가 피코타로(Pikotaro)의 노래와 춤을 잘 따라하던데요”라고 아베가 말을 건네자, 이방카 부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연신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피코타로는 45초짜리 유튜브 동영상 ‘PPAP(Pen Pineapple Apple Pen)’를 발표해 세계적 인기를 얻은 일본 코메디언 고사카 가즈히토의 예명(藝名)이다. 이방카는 2016년 11월 초 딸이 피코타로의 PPAP 노래를 따라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맨 꼭대기층 펜타하우스의 회담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방카는 트럼프에게 ‘이분(아베)이 제가 그저께 인스타그램에 올린 아라벨라의 피코타로 춤을 보셨대요’라고 말했고, 그 순간 트럼프의 얼굴이 확 펴졌다. 45분 예정이던 회동은 두 배인 90분간 이어졌다.
◇손녀 정보까지 입수...넓고 깊은 워싱턴 인맥 관리
이방카가 올린 동영상을 파악한 트럼프팀이 아베에게 “‘중요 정보’이니 잘 활용하시라”고 보고했고, 아베는 현장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화제를 삼음으로써 트럼프와의 첫 만남을 대성공으로 만들었다.
아베는 회고록에서 “덕분에 나중에 트럼프로부터 ‘이방카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까다로운데 아베 총리에 대한 평가가 가장 높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미국 핵심 인맥 관리와 전략적 판단도 한몫했다. 2016년 11월 8일 대선 결과가 예상과 정반대로 트럼프 승리로 나오자, 외무성은 사사에 겐이치로(佐々江 賢一郎) 주미대사에게 트럼프 당선인과 아베 총리의 직접 만남인 ‘플랜 B’ 가동을 지시하는 긴급 전문을 보냈다.
◇③”트럼프와 한 편 돼라”는 전략적 지침
사사에 대사는 트럼프의 맏사위인 재러드 쿠슈너를 만나 트럼프·아베 회동을 부탁했고 며칠 후 날짜와 장소를 통보받았다. 이는 평소 워싱턴 D.C. 네트워킹을 통해 트럼프 주변 인사들을 주도면밀하게 관리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트럼프가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그에게 싫은 표정이나 말을 하지 말고 무조건 한 편 돼라’는 트럼프 팀의 전략적 지침도 적중했다. 아베는 건의 그대로 “나는 당신(트럼프)을 믿고 의지한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나는 함께 있을 것”이라며 트럼프에게 무한한 긍정과 편안함, 용기를 주었다.
아베는 언론과 국제사회에서 ‘트럼프의 푸들’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세계 각국이 시샘 낼 정도로 긴밀하고 부드러웠다.
◇한 번 전화하면 보통 1시간~1시간 30분 통화
일례로 2017년 2월 아베는 플로리다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골프 라운딩을 하기 위해 트럼프와 나란히 미국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 조종석에 앉아 워싱턴 DC를 출발했다. 2019년 5월 트럼프의 도쿄 방문 때는 미국 대통령 전용 의전 방탄 리무진 ‘비스트(Beast)’에 동승했다. 보안 등의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 시절 한 번도 외국 국가정상에게 허용한 적 없는 전례를 깬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당사자인 문재인 한국 대통령 보다 아베 총리와 더 자주, 더 오래 통화하며 대책을 논의했다. 북한의 6차 핵 실험 이후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도발이 잇따르던 2017년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1주일동안 두 사람은 4차례 통화했다. 아베는 트럼프와의 전화통화와 관련해 이렇게 밝혔다.
“미국 대통령은 바쁘기 때문에 (전화통화에) 긴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트럼프는 달랐다. 꽤 시간을 내주었다. 트럼프는 아무렇게나 1시간동안 얘기한다. 길면 1시간 반도 되고. 중간에 이쪽이 지칠 정도였다.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본론은 전반 15분 만에 끝나고 나머지 70~80%는 골프 이야기나 다른 나라 정상의 비판 등이었다.”
◇'푸들’이란 조롱 들으면서 국익 챙겨
아베는 트럼프의 주한미군 철수 결행을 막았고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 개념을 창안해 트럼프에게 건네줬다. 트럼프는 이를 미국의 새 국가안보 전략으로 채택했고, 조 바이든 민주당 행정부까지 이 개념을 그대로 계승해 쓰고 있다.
아베는 이 과정에서 트럼프와 동반 라운딩을 하다가 골프장 벙커에서 뒤로 넘어지는 것 같은 해프닝을 빚었다. 그러면서 미국을 위시한 세계 각국 언론으로부터 트럼프에 맹종(盲從)하는 ‘푸들’이라는 조롱을 들었다. 아베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반응했다.
“나는 뉴욕타임스로부터 ‘아베는 트럼프에게 아부만 하니 한심하다’고 꽤 얻어맞았다. 하지만 (트럼프에게) ‘당신 참 대단하다’고 구두(口頭)로 칭찬함으로써 모든 것이 잘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미국의 정책은 잘못됐다’고 불평해 봐야 미·일 관계가 어려워지면 일본에 어떤 이익도 되지 않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총GDP의 2% 이상으로 국방비를 늘려달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대해 신경전을 벌이며 재임 중 트럼프와 껄끄러운 관계로 시종일관했다. 트럼프는 결국 2020년 9월 주독미군 3만 4500명 가운데 3분의 1인 1만 1900명을 철수시켰다.
그는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는 더이상 ‘봉’이 되고 싶지 않다. 독일이 내야 할 돈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군 병력을 줄이는 거다”고 말했다.
◇“트럼프 상대하려면 반복과 끈기 중요해”
트럼프 백악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은 “한국 정부에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모델을 따르라고 권하고 싶다”며 “아베는 기회 있을 때마다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하고 함께 골프를 쳤다. 그 결과 트럼프는 아베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트럼프를 상대하는 일엔 반복과 끈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두 정상의 유례없는 밀월 행보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진영에서 1,2위 이자 아시아 최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일본의 국제 위상이란 배경에 힘입은 바 크다. 동시에 전 세계에서 공격적으로 세력을 팽창하는 중국에 맞서야 한다는 양국의 관심사가 일치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아베 없는 아시아’...트럼프 귀환에 더 대비해야
외부 환경이 동일하더라도 모든 미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두 사람처럼 호흡을 같이 하기는 어렵다. 온갖 변수와 일본 안팎의 냉소적인 시선을 이겨내고 아베 총리와 휘하 관료들이 ‘원 팀’이 돼 트럼프 다루기에 전력투구한 결과이다. 아베는 부드러움과 겸손으로 변덕스럽고 강한 성격의 트럼프를 통제·지배하는 지혜와 용기를 실천했다.
4개월여 남은 올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당선된다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은 더 깊고 거센 격랑에 휩쓸릴 가능성이 높다. 아베처럼 트럼프와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정치인이 아시아에선 전무(全無)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빅 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는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2024년 6월 26일자 기고문에서 “1기 때 보다 더 혼란스러울 트럼프 2기에 아시아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아시아 각국은 ‘트럼프 귀환’에 더 신경써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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