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불거진 재현의 윤리 [1인칭 책읽기: 정지돈 작가의 브레이브 뉴 휴먼]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
문학이 재현할 수 있는 것
어디까지 그 범위인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 "소설은 허구의 창작물이고 소설 속 주인공 또한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일 뿐이다." "소설 속 화자가 작가 본인이 아니다." 이 말은 문학계 내에서는 상식처럼 여겨졌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오롯이 텍스트만으로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들어왔고 나 역시 여기에 수긍했었다.
그러나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운동이 일어나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다수의 기성 문인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SNS상에 폭로됐다. 그들이 현실 세계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은 글, 그러니까 문학에서 나왔다.
실상 작가와 작품은 분리되지 않았다. 문학에서 얻은 힘은 현실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작품 속 이야기들의 다수는 작가의 거울 속 형상이었음이 물리적 세계에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이후 배운 것은 작가와 작품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싫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의 목도였다.
기존의 문학계 내 합의나 담론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에 의해 해체됐다. 특히 독자들의 윤리적 요구와 페미니즘 운동은 중년 남성 중심의 문단문학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페미니즘과 정치적 정의로움을 채워넣었다.
'재현再現의 윤리'와 '당사자성 이야기'도 이 시점에서 주목받았다. '작품'이라는 이름 아래 피해자나 소수자를 함부로 다루지 말자는 이야기는 일견 타당해 보였다. 특히 약자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자는 것은 따뜻한 의견이었고 중요한 듯했다.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고 재현한다는 문학의 기능이 애초에 가능한 것인지 반성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지난 6월 23일 '김현지, 김현지 되기'라는 글이 네이버 블로그에 올라왔다. 내용은 소설가 정지돈이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에 자신(김현지)이 교제 당시 말했던 스토킹 피해 경험, 연애 일화 등이 '에이치(H)'라는 여성 주인공을 통해 허락 없이 재현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지돈 작가의 최신작인 「브레이브 뉴 휴먼」에서는 작중 인물 '권정현지'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했고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 그리고 가족사가 또 인용했다는 고발이었다. 김현지씨는 작가에게 책 절판과 사과를 요구했다.
정지돈 작가는 이틀 뒤인 6월 25일 자신의 블로그에 "「브레이브 뉴 휴먼」의 캐릭터 '권정현지'의 이름을 보고 김현지씨가 받을 충격과 아픔을 깊이 고려하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권정현지는 다른 이로부터 이름을 따왔으며 소설 속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들"이라며 "제가 직접 현장에서 겪은 일을 실제 인물을 특정할 수 없게 변형해서 서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한번 재현의 윤리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정지돈 작가가 처음도 아니다. 올해 초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소설 당선작 「호모 헌드레드」가 전 직장 동료들의 대화와 이야기를 무단 인용했다는 재현의 윤리 문제가 터져나왔고, 2021년에는 김세희 작가, 더 이전인 2020년에는 김봉곤 작가가 누군가의 삶을 허락 없이 재현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지적을 받은 작가들은 독자들의 강력한 윤리적 요구에 작품 활동이 어려워졌다.
2016년 페미니즘 운동 이후 독자와 문학계는 문학이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가 되는 것에 엄격해졌다. 이는 윤리적 발로였다. 그래서 자전 소설인 오토픽션과 퀴어문학이 소환됐다. 소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이야기를 퀴어 당사자가 직접 함으로써 완벽한 윤리의 틀을 갖추고자 했다. 또한 출판사 역시 퀴어(게이) 서사를 여성독자에게 판매하기 위한 상품으로 이해해 퀴어(게이) 문학 붐을 이뤘다.
문제는 문학 그 자체가 재현 없이는 불가능한 콘텐츠라는 데 있다. 작가가 경험한 일을 재현하더라도 그 경험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고 '개인의 독립적 경험'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순간 누군가와 소통하고 만나고 겪는다. 삶이란 언제나 타인과 함께한다. 결국 내 삶이란 항상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오롯이 혼자 있는 이야기가 소설이 된다면 그것은 웅얼거림에 가깝다.
그래서 오토픽션이라 해도 결국 타인의 이야기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최근 문단 작가들이 SF(과학 공상 소설)를 쓰는 것 역시 이런 재현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SF 역시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를 단순히 미래로 옮겨 놓는 것으로는 이런 '재현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김세희, 김봉곤, 동아일보 신춘문예 그리고 정지돈까지 왔다면 이번 사건과 별개로 우리는 다시 한번 문학의 재현의 폭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누군가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말할 것이며 누군가는 피해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문학적 윤리를 꼬집을 것이다.
상대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강자를 풍자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재현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재현하는 것이 문제라 할 수도 있다. 독자들의 시민윤리 역시 많이 변했다.
누군가는 정지돈 작가가 작가로서 게을렀거나 실력이 부족해 생긴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시스템, 구조 그리고 사회적 합의까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정답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소한 문학계 내 일종의 합의가 필요하다.
2016년 이후 우린 문학계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 이후 바뀐 것과 사라진 것을 이야기해 볼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의 작법을 유지할 것인가. 현실의 무게 앞에서 문학을 무어라 이야기하는가. 우리의 독자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 작가에게도 그리고 또 독자에게도 모두 필요한 일이다.
이민우 문학전문기자
문학플랫폼 뉴스페이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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