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혈질 처칠도 조건없이 사랑했다는데”…항상 그와 함께 했다는 ‘이것’ 뭐길래 [전형민의 와인프릭]
나치 독일의 유럽 침공과 함께 영국의 제42대 총리로 임명된 처칠은 현대에 와서 뛰어난 리더십과 선견지명을 지닌 위인으로 존경받지만, 당시에는 고집스럽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불같이 화를 내는 다혈질인 탓에 사람들이 가까이 지내길 꺼렸다고 하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때문에 처칠에게는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달래줄 자신만의 몇 가지 취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림과 시가, 그리고 와인입니다. 특히 그림 실력은 수준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죽기 전까지 55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고, 현재도 활발하게 경매가 이뤄집니다.
시가 또한 그를 상징하는 아이템이죠. 위에서 묘사한 처칠 사진이 그의 시가 사랑과 연결돼 있습니다.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처칠의 초상 사진을 찍으려다가 도무지 그가 입안의 시가를 놓지 않자, 찰나의 순간에 뺏어버리고 찍은 장면이라고 합니다. 아끼던 시가를 뺏기자 순간 화가 난 처칠의 굳어진 표정이 촬영된 것 입니다.
이처럼 성격이 불 같던 처칠조차 조건 없이 사랑한 술이 바로 샴페인 폴 로저(Pol Roger) 입니다. 그는 평생 4만2000병이 넘는 폴 로저를 마셨다고 합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애마에도 폴 로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금이라면 반려견이나 반려묘에게 참이슬, 처음처럼 같은 이름을 붙여준 셈 입니다.
과연 폴 로저의 무엇이 이 괴팍하기 짝이 없는 노인네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았던 것일까요? 이번 와인프릭은 윈스턴 처칠이 사랑한 샴페인 폴 로저에 대해 얘기해봅니다.
“제군들, 우리가 싸우는 목적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샴페인 때문이라는 것도 기억하라.”(처칠)
거대 자본으로 운영되는 샴페인 하우스들 틈에서 현재까지 연간 총량 150만병 내외를 생산하는 중소 규모의 하우스로 6대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12곳 뿐인 PFV 소속이기도 합니다. PFV는 라틴어로 Primum Familiae Vini(가족경영 와이너리 협회)입니다. 단지 와이너리를 가족끼리 경영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세계적인 명성을 지녀야 하죠.
처칠과 폴 로저의 만남은 그 34세의 젊은 내각 장관이던 1908년에 시작됩니다. 그가 와인상 랜돌프 패인 앤 선즈(Randolph Payne & Sons)에 ‘1895년 폴 로저 1다스’를 주문한 송장이 사료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폴 로저에게 직접 연락해 영국으로 공수해오는 일이 잦아졌고, 그의 폴 로저 사랑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처칠은 아예 엘리자베스2세가 대관식을 한 해인 1953년 켐튼 경마장에서 승리를 거둔 자신의 경주마에게 ‘폴 로저’라는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합니다.
처칠이 왜 이토록 폴 로저를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폴 로저의 5대 오너인 위베르 드 빌리는 “당시 폴 로저는 세계 3대 샴페인 브랜드였고, 특히 영국에서는 시장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위기와 재난이 계속된다 해도, 나에게는 언제나 샴페인 한잔 마실 잠깐의 여유가 있다.”(처칠)
처칠이 세상을 떠났지만 폴 로저와의 우정은 계속됩니다. 처칠 사후 10년, 폴 로저는 처칠을 더욱 오래 기념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고, 1984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최고급 샴페인, 폴 로저 뀌베 써 윈스턴 처칠(Pol Roger Cuvee Sir Winston Churchill)을 출시합니다. 처칠의 출생지인 블렌하임 궁전에서 출시를 발표했지요.
특히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써 윈스턴 처칠’은 오로지 최고 품질을 보장할 수 있는 해에만 생산하고, 10년 이상 숙성하며, 그 생산품에 ‘처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 매번 처칠의 막내딸인 마리(Mary Soames)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처칠과의 우정을 폴 로저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써 윈스턴 처칠’은 첫 생산 이후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한 양조법과 블렌딩 비율 등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빌리는 “윈스턴 처칠의 굴하지 않는 꿋꿋한 정신과 캐릭터를 반영했다”고만 답했습니다.
폴 로저의 처칠에 대한 사랑은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지난 2011년에는 오랜 기간 노력과 설득 끝에 에페르네시 폴 로저 본사의 뒷골목 행정명을 ‘Rue Winston Churchill’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난 담배와 술을 하지 않고 100% 건강합니다.”(몽고메리 장군)
“글쎄요. 난 담배와 술을 하고 200% 건강합니다.”(처칠)
현대의 폴 로저는 엔트리급인 브뤼 리저브부터 밀레짐(빈티지 샴페인·샴페인은 일반적으로 빈티지를 기재하지 않는다), 블랑 드 블랑(청포도인 샤도네 100%로 만드는 샴페인) 등 다양한 종류의 샴페인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보다 생산하는 종류가 늘었다고 하더라도 ‘품질 최우선’이라는 가치 만큼은 변함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여전히 리들링(샴페인 양조 과정에서 생기는 효모 찌꺼기 침전물을 수개월간 병목으로 서서히 모으는 방법)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게 대표적인 예 입니다.
이미 정교한 기계가 발명됐고 많은 샴페인 하우스가 기계를 사용하고 있지만, 폴 로저는 굳이 5명의 리들링 전문 인력을 동원해 리들링 작업을 여전히 수작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폴 로저 하우스의 좌우명은 “가치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La valeur n’attend pas le nombre des annees)” 입니다. 좋은 와인은 떼루아와 생산자의 실력으로 이미 정해진다는 의미, 다시 말해 완벽한 샴페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는 뜻이죠.
이 한 문장만 보더라도 그들의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확고한 철학과 자신감이 윈스턴 처칠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저녁은 그가 사랑했던 폴 로저 한 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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