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력엔 ‘펄떡펄떡’ 꼬리? 몸통이 억울하겠네[음담패설 飮啖稗說]
다닥다닥 이어지는 간판의 행렬 속. 무심코 한 곳에 눈이 갔다. ‘살아 있는 비아그라.’ 그로테스크한 기분이 들었으나 간판의 홍수 속에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혹시 장어집인가’ 싶었는데 맞았다. 웬만한 중장년층에게 장어는 스태미나를 충족시켜주는 보양식으로 통한다. 기력이 떨어지는 여름철엔 특히 장어집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단백질과 불포화지방산을 비롯해 좋은 영양소가 풍부하기 때문에 먹고 나면 기력이 생기고 든든하다. 그뿐인가. 고소하고 진한 풍미를 지닌 진미인지라 많은 미식가를 유혹한다. 숯불 위에서 자글자글 연갈색 빛으로 익어가는 장어는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장어의 여러 부위 중에서도 고갱이로 꼽히는 것은 꼬리다. 힘차게 펄떡거리는 장어 꼬리는 정력과 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수년 전 지인들과 함께 갔던 장어집에서 서빙하던 분은 유독 장어 꼬리를 남자들 쪽으로 놓아줬다. “이거 먹고 힘쓰면 내일 아침 밥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둥 시답잖은 농담이 오갔던 기억이 난다. 꼬리를 누가 먹을지 눈치를 보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모르는 척 한 조각을 덥석 입에 넣었다. 딱히 몸통과 꼬리 부분의 맛엔 차이가 없는데 영양소에서 차이가 있다는 건가.
꼬리 부분이 정력에 더 좋다는 설이 근거 없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과학적 상식이다. 힘찬 꼬리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유감주술에 따른 믿음이다. 성적기능에 대한 맹신과 미신이 낳은 오해다. 하지만 장어는 예로부터 활력을 높이고 기운을 돋우는 데는 도움이 됐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장어는 식재료보다는 약재에 가까웠던 것 같다. 조선 세조 때 편찬됐던 식이요법서 <식료찬요>에서는 피부병의 하나인 역양풍을 치료하려면 뱀장어에 쌀을 넣고 삶아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했다. 과로로 인해 몸이 쇠약(허로병)해졌을 때도 뱀장어를 구워 공복에 먹을 것을 권했다.
힘찬 움직임이 만든 이미지일 뿐 몸통과 꼬리의 영양가 차이 없어
단백질·불포화지방산 등 풍부해 조선시대 각종 병 치료제로 쓰여
<동의보감>에는 노채(폐결핵)에 걸려 다 죽어가는 여인을 가족들이 관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한 어부가 그 여인을 건져낸 뒤 뱀장어를 많이 끓여 먹여 병을 고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 같은 고문헌에선 장어를 만리어 혹은 만려어라고 칭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서는 오래도록 설사를 하는 사람에게 뱀장어로 죽을 만들어 먹이면 설사가 그친다고 했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 중에선 연산군이 정력강화를 위해 장어요리를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그 출처로 <식료찬요>를 들고 있으나 이 책은 세조 때 지어진 것이니 맞지 않다. 실록에서 연산군이 정력제로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잠자리, 베짱이, 귀뚜라미와 같은 곤충류, 그리고 사향노루와 사슴의 생식기, 뱀 등이었다.
양념장(다레 垂れ)을 바르거나 소금을 뿌려 불에 구워먹는 방식, 게다가 진미로 각광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로 봐야 한다는 것이 설득력 있다. 일본에서는 장어를 오랫동안 귀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여겼다. 17세기 조선 문신 남용익이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쓴 <문견별록>에는 일본의 풍속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다. 그중 음식과 관련한 부분에서 “구이는 생선이나 새로 하는데 뱀장어를 제일로 친다”는 기록이 있다. 즉 현재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먹는 장어구이는 일본 식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에서는 장어를 ‘우나기’라고 한다. 장어덮밥인 우나기동, 우나기쥬, 나고야의 명물로 알려진 히쓰마부시 등은 국내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일본식 장어요리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선 우나기동 맛집을 쉽게 검색할 수 있다. 일본에서 장어는 여름에 기력을 보충하고 에너지를 제공하는 데 꼭 필요한 음식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 삼계탕을 먹는 ‘복날’이 있다면, 일본에는 7월 하순 장어 먹는 날인 도요우노우시노히(土用の丑の日)가 있다. 에도시대 때부터 이 같은 풍습이 자리 잡았다 하니 수백년간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다.
장어는 한국이나 일본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기운을 북돋는 요리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장어젤리(jellied eels)가 대표적이다. 장어를 끓여 육수를 젤리처럼 굳힌 형태의 이 요리는 영국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즐겨 먹는 것으로도 명성을 얻었는데, 외관 때문에 한때 ‘괴식’으로 불리며 인터넷 밈으로 활발히 소비됐다. 산업혁명기 런던 템스강에서 잡은 장어로 서민들이 주로 만들어 먹었던 데서 유래했다.
네덜란드에는 흐로크트 팔링(Gerookte Paling)이라는 훈제장어 요리가, 독일에는 함부르크에서 시작된 전통 장어수프 알주페(Aalsuppe)가 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선 장어스튜를 먹는다. 이탈리아의 앙귈라 알라 지오베제(Anguilla alla giovese), 앙귈라 알라 무라네제는 각각 토스카나 지역과 베네치아 지역의 전통 장어요리다. 스페인의 앙굴라(Angulas)는 새끼 뱀장어로 만든, 바스크 지역의 별미다.
화가 피카소가 좋아한 요리는 장어스튜인 ‘장어 마틀로트’였다. 같은 제목으로 그가 그린 그림도 있는데, ‘뱀장어스튜’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호색한이었던 피카소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성 재클린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에는 뒤엉켜 있는 뱀장어 몇마리와 양파가 담겨 있다. 2002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뱀장어스튜>를 썼던 권지예 작가는 피카소의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주위에선 여수에 장어 샤부샤부를 먹으러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꽤 들린다. 서울에도 장어집이 널렸는데 여수까지 가서 먹어야 하냐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장어라고 다 같은 장어는 아니다. 여수에서 샤부샤부로 먹는 장어는 뱀장어가 아니다. 장어는 크게 뱀장어, 갯장어, 붕장어, 곰장어(혹은 먹장어)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중 장어 하면 언뜻 떠올리게 되는, 양념장을 바르거나 소금을 뿌려 구워먹는 것이 뱀장어다. 뱀장어만 민물장어이고 나머지는 바닷장어다. 식당 간판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풍천장어’는 뱀장어를 말한다. 풍천은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밀물 때면 해풍이 불어오는데, 바람이 부는 강어귀에서 잡히는 뱀장어라는 의미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전북 고창의 인천강, 강화도 앞바다, 전남 나주의 구진포 등은 예로부터 풍천이 있어 장어로 유명했던 곳이다.
여수의 별미로 꼽히는, 샤부샤부로 먹는 장어는 갯장어다. 육수에 장어 살을 데쳐서 양파 등 채소와 함께 싸 먹는데, 달고 진한 감칠맛이 뛰어나다. 갯장어는 양식이 불가능하고 어획 기간이 짧아 여름철에만 먹을 수 있다. 일본에선 갯장어를 ‘하모’라 부르며, 샤부샤부나 회로 즐겨 먹는다. 일본 교토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갯장어요리를 다양하게 선보여왔다.
가장 물량도 많고 흔한 것이 붕장어다. 일본어로 ‘아나고’라고 한다. 회나 탕으로 즐겨 먹는다. 여수, 고흥 등 남해안 지역에서 만나는 장어탕이 붕장어로 끓인 것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이 세 가지 장어를 구분해 뱀장어는 ‘해만리’, 갯장어는 ‘견아리’, 붕장어는 ‘해대리’라고 각기 칭했다. 뱀장어에 대해서는 큰 구렁이와 비슷하다고 했으며, 갯장어는 “이빨은 개와 같고 가시와 뼈가 단단해 사람을 물 수 있다”고 묘사했다.
‘꼼장어’라는 말이 더 친숙한 곰장어 혹은 먹장어는 부산을 대표하는 메뉴 중 하나다. 자갈치시장이 원조로 꼽힌다. 부산 기장 해변에선 짚불구이로 먹는다. 곰장어는 가죽을 벗겨 지갑이나 구두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일제강점기 부산에는 이 같은 가죽 공장들이 있었다. 전쟁을 겪고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가죽을 벗기고 남은 속살을 양념 발라 구워 먹기 시작한 데서 곰장어구이가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곰장어에 장어라는 글자가 붙어 있긴 하지만 장어는 아니다. 척추동물 중에서도 가장 하등한, 턱이 없는 무악동물이다. 뱀장어나 갯장어 입장에서 곰장어가 같은 장어로 여겨지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무악동물로 ‘장어’라는 글자가 붙은 것으로 곰장어 외에 칠성장어가 있다. 한국에선 곰장어가 익숙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칠성장어가 더 친숙하다. 고대로마시대부터 칠성장어를 많이 먹어왔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5세도 중독 수준으로 칠성장어 파이를 먹었다고 한다.
맛은 좋지만 장어의 생김새는 좀 그렇다. 특히나 우글우글 몰려 있는 장면은 시각적 쇼크를 준다. 수십년 전 보았던 영화 <양철북>의 한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미끼로 던졌던 말 머리를 바다에서 건져올리자 구멍이란 구멍에선 장어가 꿈틀거리며 기어나오던…. 누군가는 데인 더한이 출연한 <더 큐어>도 만만찮다고 했다. 엉뚱하게도 일본영화 <우나기>가 궁금해졌다. 칸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 외엔 머릿속에 어떤 정보도 없었다. ‘제목이 우나기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장어가 나오는 건가’ 싶은, 무식한 말초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결론. <우나기>는 절대 ‘그런’ 영화가 아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도파민에 중독된 뇌를 정화해주는 작품이었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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